몇 시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지난밤부터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한 남자를 보았다. 내가 한 번 정도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낯선 그런 느낌의 남자. 다시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텔레비전을 켜니 음악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었다. 바그너였다.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언제 방송되는지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케이블에서 하루에 두 번 방송되는 프로그램이었고 그렇다면 지금은 오전 11시이거나 새벽 3시였다. 나는 2시간을 잤거나 11시간을 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취미가 없었다. 텔레비전도 보지 않았고, 영화도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라디오나 음악을 듣기는 했지만 특별히 선택해서 듣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냥 틀어놓고 틀어놓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책을 읽고 무언가를 끄적이기도 했지만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요리를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하지도 않았다.
가끔 그런 나를 생각해보면 도대체 어떻게 시간이 지나가는 걸까 신기해지곤 했었다. 그 무렵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서 시간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내 삶에서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계속되는 건 악몽과 질주뿐일 것만 같았다. 그런 어느 날 그 책이 우연한 사고처럼 나를 찾아왔다.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어도 상관없을 그런 이야기들은 내 머릿속을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다니며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읽은 그 책은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이었다.
《은밀한 생》은 표면적으로는 남자가 첼로 교습을 받던 중 여선생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지만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는 없는, 사랑에 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백과사전이고 또한 사색과 사유로 가득한 철학서였다.
그해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 내내 특히 비 오는 날이면 나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누구에게도 그 책의 이야기를 해줄 수 없었다. 은유와 사색으로 가득 찬 그의 글은 읽어도 읽어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책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은밀한 사랑은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고, 이듬해 봄이 오자마자 나는 그의 책을 집어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보란 듯이 햇빛 찬란한 생으로 돌아온 나는 이번에는 너무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온종일 틀어놓고 있었고, 그래서 며칠 동안 케이블방송에서 하는 것까지 같은 드라마를 서너 번씩 보기도 했고, 더 이상 빌릴 새 비디오가 없었으며, 세상의 모든 음악들이 너무 익숙해져 음악처럼 느껴지지도 않다. 그런대로 그를 잊을 수도 있었다.
친구를 기다리던 서점에서 그를 우연히 보고 말았다.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바라보았다.《떠도는 그림자들》
기다리던 친구가 나타나 내게 물었다. 그 책은 뭐니?
나는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그럴 것이다. 나는 파스칼 키냐르의 책이라면 어떤 설명으로도 불충분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책 《떠도는 그림자들》을 읽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돌아가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여전히 두려웠다.
심장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른다. 그리고 속삭인다.
괜찮아. 나갈 수 있어. 나갈 수 있다니까. 걱정하지 마. 나갈 수 있어.
지나간 일은 생각하지 않으련다. 돌아보면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비 오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처럼 마음이 아득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파스칼 키냐르를 읽는 일은 마치 다른 별에서 일어난 일처럼 경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