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연애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 무엇을 얻게 될지 절대로 알 수 없지.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You never know what you’re going to get
- 영화 <포레스트 검프> 中에서 -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절대로 알 수 없다. 포레스트 검프의 엄마가 했던 말처럼. 그리고 2022년 봄, 내가 그녀를 만났던 것처럼.
함께 일했던 웹드라마 스탭들과 회식을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하필 신도림이 종점인 2호선 전철을 탔다. 공항철도를 타기 위해 성수(외선) 방면 2호선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마스크를 쓴(코로나 때문에 모두가 마스크를 쓰던 시기다) 외국인 여성이 영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길을 잃어서 그런데… 구로디지털역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나와 방향은 달랐지만 타는 곳이 같았다. 나를 따라오라 말하며 그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그녀는 독일인이었고 현재 한국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나이는 나보다 3살이 많았다. 승강장에 도착해 열차를 기다리다가 용기를 내어 물어봤다.
“내일은 뭐 하세요?”
다음날 저녁 그녀를 만났다. 여자친구를 사귄 적은 없었지만 데이트는 몇 번 해봤다. 하지만 능숙하지 못했다. 나의 모든 행동들은 굉장히 어색했다. 식당부터 잘 못 골랐다. 외국인에게 한국 음식을 선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평양냉면 집을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외국인들은 차가운 국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식당을 나와 술집에 가려했는데 가는 곳마다 문이 닫혀 있었다. 이것도 나중에 알고 보니 해당 지역의 가게들은 화요일에 대부분 문을 닫는다고 한다. 그날이 화요일이었다. 결국 치킨집을 갔다. 또래오래였다. 이거 완전 망쳤구나 싶었다.
전철역에서 헤어지려는데 그녀의 눈빛이 묘했다. 나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듯한 느낌..? 에라 모르겠다 다시 용기를 내서 물었다. 너네 동네로 가서 한 잔 더해도 되겠냐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말했다.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그날 이후 나와 그녀는 계속 만났다. 처음 만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에게 사귀자고 했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그녀가 매력적이진 않았다. 똑똑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외모도 아름답지 않았다. 그럼 왜 사귀자 했냐고? 나는 그녀가 고마웠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다니 기적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머나먼 타국에서 오지 않았나.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여자친구를 사귀지 못한 게 아닐까. 과몰입을 했다.
심지어 그녀에게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자고 했다. 어차피 그녀는 2주 뒤 한국을 떠나야 했다. 함께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녀가 우리 집에서 지내면 숙박비를 내지 않아도 되니까 그 돈을 데이트 비용으로 쓸 수도 있었다. 그녀도 좋다고 했다. 그렇게 2주 동안 함께 지냈다. 그때부터 비극이 시작됐다.
그녀는 툭하면 내게 화를 냈다. 연인 사이에서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는 거 무의미하다. 나도 안다. 하지만 정도가 심했다. 한 번은 그녀가 걸어가다가 벽에 팔을 부딪혔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가 혼자 걸어가다가 팔을 부딪힌 거다. 그녀는 나에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화를 냈다. 내가 염력을 쓴 것도 아니잖아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말을 하면 그녀는 마땅한 이유를 대지 못했다. 그저 화만 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내 앞에서 ‘한국인들은 정말 게으르다’고 흉을 보는 거다. 그래서 말했다. 나도 한국 사람인데 내 앞에서 한국인을 그런 식으로 비난하면 기분이 나쁘다고. 그랬더니 소리를 지르며 또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자기는 무슨 말도 못 하냐는 거다. 말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모든 한국 사람이 게으르다고 일반화시켜 비난하지 말라고 다시 말을 했다.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화를 냈다. 그녀를 만난 지 3주가 채 되지 않았는데.. 점점 지쳐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독일로 돌아가기 하루 전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그녀는 울면서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얼마나 심하게 울었는지 구토까지 했다. 심지어 비행기 티켓을 일주일 뒤로 미뤘다.
“아니, 독일 가서 출근을 해야 하잖아? 네 휴가는 내일까진데 회사에는 뭐라 말할 거야?”
라고 묻자 그녀는 어치파 내 휴가 내 맘대로 쓰는 거니까 상관없다고 했다. 내가 볼 때 굉장히 상관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막무가내, 안하무인인 사람이었다.
일주일이 지나 그녀가 독일로 돌아갔다. 헤어지려 했는데 떨어져 있으니 또 보고 싶었다. 그때까지도 그녀가 고마웠다. 이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다행?인 건 통화나 문자로 연락만 하니까 싸우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고 그녀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녀는 독일에서 실업급여를 받고 있었다(독일은 한국보다 실업급여 제도가 훨씬 잘 되어 있다. 너무 부러웠다…). 두 달 전 그녀 마음대로 휴가를 연장한 덕분에 그녀는 회사와 계약 연장에 실패했고 백수가 되었다. 돈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한국에 올 거라고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나를 보기 위해 한국에 오는 건데. 그래서 비행기 티켓 값의 절반인 50만 원을 주기로 했다. 그녀는 기뻐하며 이 돈을 데이트할 때 쓰자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에 도착한 그녀는 약속과 달리 내가 준 50만 원을 데이트 비용으로 쓰지 않았다. 다른 친구를 만날 때 쓰거나 독일에 있는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사는 데 썼다. 문제는 데이트할 때 그녀가 돈을 전혀 쓰지 않으려 했다는 거다(정말 단 한 푼도 쓰지 않으려 했다). 나는 기분이 상했다. 돈이 아까운 게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그녀가 나를 위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한국 여행을 하기 위해 나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짜증이 시작됐다. 당시 나는 다른 드라마의 보조작가 일을 시작해서 매우 바빴다. 그녀는 왜 이렇게 바쁘냐며 화를 냈다. 나도 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않나? 먹고살아야 하니까. 계속 티격태격했다. 그러다 더는 참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녀는 태국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태국? 항상 돈이 없다며 노래를 부르던 그녀였다. 그런데 태국을 어떻게 가려고 그래? 내가 묻자 그녀는 티켓이 싸다고 했다. 한화로 왕복 30만 원이었다. 숙식은 어떻게 할 거냐 물었다. 지금 자기 친구가 태국에 있는데 같은 방을 쓰면 숙박비를 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인칭대명사 ‘He’를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남자야?”
“응, 근데 걔는 게이야.”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게이’인 네 친구랑 같은 방에 묵으면서 태국을 여행하겠다고? 그녀는 그렇다고 했다. 게이인데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화도 안 났다. 갔다 오라 했다. 그녀가 우리 집에 머물면서 계속 내게 짜증을 내는 것보다 잠시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편이 나았다. 그녀의 친구가 게이인지, 양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트랜스젠더인지, 같이 방을 쓰든지, 섹스를 하든지 말든지 상관없었다. 그녀는 내게 과민반응하지 말라고 했다. 자기가 태국에서 멋진 선물을 사다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그렇게 4박 5일간 태국을 여행한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게 작은 초코브라우니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뭔데?라고 묻자, 그녀는 선물!이라고 해맑게 답했다. 이게.. 선물이라고? 어이가 없었다. 그 ‘게이’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는 길에 먹으라고 준 브라우니란다. 어이없음을 넘어서 그녀가 무서워졌다. 그녀는 선물 살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헤어질 결심을 했다.
그녀가 독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나는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전처럼 면전에 대고 헤어지자 했다가 그녀가 난리를 치며 귀국 날짜를 미룰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그녀가 독일로 돌아간 후 전화로 이별을 통보했다. 역시나 그녀는 울면서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나는 너보다 좋은 남자 충분히 만날 수 있어. 넌 정말 이상한 놈이야. 알아?”
내가 말했다.
“나보다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으면 만나. 아무 문제없어.
하지만 우린 이제 끝났어.
그러니까 적어도 날 욕하진 마. 나도 너한테 할 말 많지만 참고 있거든.”
그렇게 나의 초라한 첫 연애가 끝났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무엇을 얻게 될지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리고 초콜릿 상자에 꼭 초콜릿이 들어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때론 초콜릿처럼 보이는 똥이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