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전남편과 이혼사유 8

성격차이 7 모든 물건에는 제자리가 있어

by 키케


신혼 혼수를 해오는 경우는 봤어도 이혼 혼수를 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리고 프랑스에 다시 입국할 때 그 미친 자가 나란 사실도 몰랐지.


2021년 6월, 파리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집안 상태는 가히 다차원의 시간이 한 공간에 겹쳐진듯한 카오스 그 자체였어. 도저히 내 논리로는 한 공간에 있을 수 없는 물건이 같이 놓여 있어서 초현실주의를 넘은 현대 예술처럼 난해했지. 예를 들면, 젓가락과 스테이플러 라든가, 컴퓨터 쿨러와 3D 영화용 안경과 같은 조합들 말이야. 유일하게 냉장고는 깔끔해서 다행이다 생각했어. 내가 없을 때 적어도 식중독으로 고독사 하진 않겠구나 싶어서.


너도 알다시피, 난 시각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라 일하기 전 주변부터 정리하는 습관이 있고, 심지어 술에 취하면 주사가 정리정돈일 정도야. 흐트러진 물건들이 무의식에 주는 정보들은 감각을 자극해 피곤하게 하거든.


그리고 정리된 공간은 효율적인 동선으로 이어져서 최소한의 움직임과 거리로 내가 원하는 물건을 빠르게 찾을 수 있기 때문도 있어. 원격으로 업무를 지시할 때 어디 어느 수납장 어느 칸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바로 답하기도 편하고 말이야.

일단 다 무너져 가는 소파 위에선 도저히 안정을 취할 수 없을 거 같아 침실로 갔는데 침실에 골프채와 빈 베이스 기타 가방이 부채와 함께 놓여 있는 걸 본 순간 난 폭발했지. 나에게 이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무논리 그 자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야. 분명 나한테 MBTI유형이 ESFJ라고 말했는데 J라면 집 상태가 이 꼴일 수 없어. 내 정보수집에 오류가 있었거나 네가 생각하는 모습과 실제 모습을 착각해 답변했거나 둘 중 하나였겠지. 그리고 나에게 J와 P의 차이는 엄청난 것을 의미해. 청소와 정리를 독박으로 누가 하냐를 뜻하거든.


“내가 집을 비운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사용한 흔적이 없는 물건들은 앞으로 내가 다 갔다 버릴 거야. 원치 않는다면 3일 내로 정리하도록 해” 난 너에게 바로 경고장을 날렸고, 넌 역시나 한다하면 안하더라. 난 내가 뱉은 말은 웬만하면 번복 안 하는 사람인 거 이제 나랑 이혼합의서 쓰니까 잘 알고 있을 거야.


회색빛 징크 지붕 바로 밑 우리 집. 이 집은 원래 파리에서 너의 세번째 자취집이었어. 층고가 유독 높고, 지붕과 벽이 부드럽게 곡선으로 이어진 모양새가 퍽 맘에 들더라. 거실 파리식 긴 창문 밖으론 가로 막은 건물 없이 쭉 뻗어나간 rue de château길을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볼때마다 괜히 두근거렸어. 오늘은 어떤 곳을 가볼까 하고 말야.


신혼집과 혼수장만 개념이 없는 프랑스는 처음 커플이 같이 살기로 결정하면 두 집 중 한집으로 합쳐 시작하곤 해. 유학 후 잦은 이사에 질린 나는 미니멀리스트었기에 내 짐은 다 합쳐도 우체국 대형박스 3개가 다였지. 그렇게 내가 너네집으로 이사하게 됐어. 트럭은 커녕 승용차 안에 다들어가는 짐을 옮겼고, 오래된 물건과 서류들로 곳곳이 가득찬 너의 집 한켠을 그렇게 차지하게 됐지.


시간이 빈틈없이 물건으로 꽉 들어찬 이 공간은 내 기억들이 아니다 보니 함부로 버리거나 정리할 수도 없어서, 정리 해달라 말하고 기다리기만 2년이 지났지. 결국 버젓한 내 옷장도 결국 없는게 그렇게 서럽더라고. 이래서 딸이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심고 옷장을 만들어 보내나, 신혼집에 혼수를 해오는게 아주 이유없는 관습이 아님을 깨달았어. 애초에 차지 하지 않으면 내 자리는 결국 생기지 않는거더라구.


그렇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다린지 4일째 되는 날 새벽, 역시나 정리 안된 집안 상태를 확인하고 버릴 물건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어. 버려질 물건의 크기를 가늠해 새로 들여 올 가구들의 위치를 지정하고 혹여나 안 맞는 일이 없게, 그리고 조립할 때 필요할 여유공간을 계산해 바로 주문했지. 주문한 가구가 너무 많아서 3차례로 나눠서 1주의 간격을 두고 배송 되도록 했어. 그리고 3주의 사전 여유 기간을 두어, 배송 전에 미리 공간을 정리하고 비울 생각을 했지.


그런데도 꿈쩍을 안하고 정리를 안하는 너의 모습에 난 기가 막혀서 더이상 너에게 묻지 않고 2년동안 안 입은 옷가지와 귀중품과 서류를 제외한 모든 잡동사니를 집 밖에 갔다 버리기 시작하니 그제야 움직이더라.


그리고 내가 부엌에 팬트리를 만들려고 12개에 달하는 나무상자를 전동 드라이버로 밤11시가 넘도록 바닥에 앉아 조립하고 있는데 와서 나에게 ‘이웃에게 소음 피해가 갈 수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하고 침실로 들어가더라? 난 새벽 내내 부엌을 정리하며 너에 대한 마음도 같이 정리했어. 그냥 이대로 야생에 다시 방생하기로.

기왕 주문한 가구와 물건들로 이쁘게 집을 꾸며주고, 너의 습관과 동선을 고려해 가구를 배치 해뒀으니까 앞으론 크게 집이 어지럽혀질 일도 없을테지. 다음 여자는 자신감있게 집에 데려 올 수 있겠네. 나름 전공 살려서 실용적이지만 구석구석 아기자기하게 꾸몄어. 이건 내가 떠나면서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야.


혹여나 해서 헷갈릴까봐 수납공간별로 라벨링 해뒀으니 왠만하면 지키도록 해. 그리고 너무 칙칙하게 풀죽어 외롭지 말라고 반려식물도 하나 사뒀으니까 풀 죽이지말고. 아직도 손 볼 구석이랑 교체해야할 가구가 몇개 있는데 그건 다음 여자랑 하도록 해. 그리고 결국 같이 살기로 하거든 내가 남긴건 다 갖다버리고 새로 시작하길.


내 짐은 다 빼도 우체국 택배박스로 5상자 나올거 같아. 2년동안 한 상자씩 늘었나보다. 괜스레 씁쓸한 마음이 드는데 이번엔 그 이유가 뭔지 굳이 파헤치고 알고싶지도 않아.


[인수인계서: 침실 왼쪽 수납장 맨 아래쪽 서랍은 이가 잘 빠지니 교체할 것, 침대 옆 오른쪽 서랍장도 정리해야 함. 대체로 다 쓸떼없는 물건들이니 과감히 버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