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전남편과 이혼여행 Day 2

마음을 흩트리는 손가락.

by 키케

‘내가 부족해서 헤어지는 걸까, 내가 더 강했다면, 네가 날 믿고 한국으로 왔을까, 아참 … 코로나였지… 그럼 코로나가 끝나면 우리 사이에 다른 가능성은 있을까’

새벽, 잠결에 넌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난 내 곁에 잠든 올리를 쓰다듬으며 복잡한 심정을 가다듬었어. 이혼여행을 너무 잘 준비한 탓에 여행이 주는 설렘이 신혼의 설렘도 다시 불러일으킬 줄 몰랐던 거지. 사람 맘이란 참 그 상황을 겪기 전까진 알 수 없는 거야.


막상 마음의 서랍을 정리하려 꺼냈는데 비운 줄 알았던 감정들이 사실 다른 일들에 치여 밀려 서랍 뒤에 처박혀 고스란히 남아 있더라.


너무 힘들었던 때, 믿고 의지할 만한 든든한 남편이 되길 바랐는데, 막상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차피 내가 누구에게 의지하고 기대는 성격이 아닌데 그런 사람이 뭐 필요했겠어. 옆에 지쳐 누우면 쿠션같이 폭신한 손으로 단지 내 머리만 쓰다듬어줘도 내겐 큰 위로가 되는데. 그것뿐인데. ‘그냥 내 곁에’가 안 되는 이 상황이 문제인 거지.


난 비우려고 열었던 마음의 서랍을 차마 뒤엎지 못하고 대충 담아 다시 닫아버리곤 여행을 그냥 즐기기로 정했어. 나에게도 너에게도 최고의 여름이 되도록 말이야.

약해진 마음을 감추기 위해 오늘은 좀 세 보이는 차가운 파란색 옷을 골라 입었어. 그리고 내 옷과 똑같은 간판 색의 까사 가이아에서 점심을 먹기로 결정했지. 보르도 지역 친환경 식재료만으로 요리하는 레스토랑이라 궁금했거든.


“와…이 샐러드 소스는 꼭 먹어봐야 해, 진한 아카시아 꿀을 썼는데 너무 맛있어”


“응 그러네, 그리고 기름은 헤이즐넛 아니 호두기름인 거 같아”


“응, 고소한 맛이 더 진하고 부드러운 맛이 호두기름 같아”

“이 가격에 이런 질의 음식이 믿겨? 세상에… 파리에서는 이 가격으론 절대 이런 음식 못 먹을 걸? 주방에 인원만 봐도 이미 5명이 일하고 있는데”


“채소도 현지 농장에서 가져온 신선한 재료라 그런지 풍미가 더 깊네”


“내가 고른 이 메뉴를 봐. 이게 보기에는 되게 단순해 보이는데. 이 음식을 담기까지 그 과정을 생각해보면 여러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노력이 들어간 요리야. 일단 농부들이 제철 야채들을 잘 키워야 하는 건 물론이고, 퀴노아 물에 불려야 하지, 각 채소별로 각각 간을 하고 따로 익히고, 그리고 송아지 고기 따로 다듬고 익히고. 홀렌다이즈 소스 따로, 거기에 신선한 산파도 다져야지, 마늘향도 약간 느껴지는 게… 여기 들어간 노동력과 시간을 계산해보면 이걸 17€에 판다니. 말이 안 돼”


마음에 드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난 그 음식이 나오기까지 들어간 노동력과 공정을 생각하며 심히 감격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걸 이해하며 맞장구쳐 주는 넌 참 좋은 친구 같은 남편이야.


단순한 끼니를 때우는 것 이상으로 식사가 가진 의미가 중요한 난, 자주 만나야 되는 사람일수록 식사 스타일이 나와 맞는지 유심히 관찰하게 돼, 맞지 않는다면 차라리 혼자 먹는 걸 선호할 정도니까.


쩝쩝거리거나,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메뉴를 통일시켜버린다던지, 한식만 먹어야 한다든지, 이 외에도 식사 궁합에 대한 나만의 기준이 꽤 세밀하게 많은 편인데 그 모든 게 나와 딱 맞는 너와의 식사시간은 늘 즐거워.


평생 같은 밥을 나눠 먹어야 할 부부에겐 매우 중요한 일이지. 음식 취향 딱 맞는 사람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거기에 와인 취향도 그래.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 각기 와인잔을 빙빙 돌리며, 향을 맡은 후, 내가 “블랙베리류, 체리향이 올라오네, 조금 더 복잡한 향이야”라고 말하면, 넌 한 모금을 입에 담고 호로록 공기와 함께 와인을 혀에 굴리면서 “첫맛이 둥글고 가볍고 나무향이 강한데 꽤 매운맛이 있네”라고 말하면, 내가 삼키며 “마지막으로 아몬드 잔향이 올라와”.라고 말하면 “송아지 고기랑 같이 마시면 좋은 와인이네”라고 네가 대답하지.


영화 007에서 서로 암호를 맞추는 듯한 이 대화. 이 즐거움을 나눌 사람을 주위에서 찾기 힘들어서 그렇게나 많은 와인 모임이 생겨난 거겠지.


이런 대화를 다시 나누니 새삼 참 즐겁네. 비싼 와인도 필요 없이 그냥 이 한잔의 기쁨을 너와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그냥 내 옆에 올 수 없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