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먹고 엄마가 어디 갔나 찾아봤더니 주방 구석에 숨어서 팔을 흔들며 음악도 없이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열심히 팔을 위아래, 왼쪽 오른쪽 흔들어대는 엄마처럼 생긴 아주머니가 있다. 이렇게 어이없는 건 처음 본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물어보니 더 알 수 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들. 엄마 팔 아파. 이제 네가 좀 해줘. 이거 이거 이렇게 흔들어서 10,000 되면 100원 받을 수 있어.
뭐라고?
착한 아이는 얼떨결에 핸드폰을 받아 들고는 이것이 젊음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팔을 세차게 흔들어대다가 금세 핸드폰 화면에 '10000'을 찍어내고는 다시 핸드폰을 넘겨준다. 몇 번의 클릭과 함께 오는 쨍그랑 소리는 진짜 돼지저금통에 돈을 넣어주는 환상을 몰고 오고서 남은 캐시에 100을 더해 올려준다. 이제 마이쮸 하나 교환 할 수 있다. 더 모아서 치킨을 받아내어 가족 외식에 보탬이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걷기. 가장 쉽게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운동이다. 대표적인 유산소 운동으로 체중 감량, 스트레스 해소, 칼로리 소진, 면역력 증가 등의 많은 장점을 가진 운동이다.
게다가 걷기만 하면 돈을 준단다. 어차피 두 발로 서서 하루 종일 걷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으니 이보다 쉬운 돈 벌기는 없지 않은가. 다만 그냥 걸으면 안 되고 앱을 깔고 광고도 보면서 가끔은 퀴즈도 풀면서 만보를 걸어야 한다.
10,000보를 걸으면 100원 정도를 준다.
100원은 집안 구석에서 여기저기 굴러다녀 마음만 먹으면 50보를 걷고도 찾을 수 있지만 내 돈 100원과 다른 사람이 주는 100원은 다르다. 일단 받고 싶다.
이런 심리를 기가 막히게 이용해서 많은 앱들이 저마다 이쁘게 운동이라는 포장지를 싸서 걸으라고 유도하면서 자사 앱 구경도 하고 틈틈이 광고도 지나치지 않고 보게 만든다. 너희들의 건강도 챙기면서 광고도 보면 이게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아닌가.
사실 이런 꼬드김이 아니면 광고 따위는 보지 않는다. 먼지 티끌처럼 숨어있는 엑스버튼을 찾아 눌러버리면 그만인 것을. 1원 5원 실제 화폐로는 볼 수도 없는 가상의 돈을 받기 위해 광고를 몇 초간 보면서 나의 뇌를 도파민의 바닷속에 담가보는 행위에 대한 죄책감은 그래도 돈은 벌었다는 합리화의 뒤에 숨겨본다.
또 이런 행태를 기가 막히게 이용하는 이용자들은 걷기 앱을 대여섯 개 설치하고 동시에 실행시킨다. 더 진심인 이용자는 핸드폰을 여러 개 쓰기도 한다. 얼마 전 60억 기부천사 션님이 걷기 앱을 설치한 핸드폰을 여러 개 들고 10Km 마라톤을 뛰셔서 기부하셨다는 기사를 봤다. 다 합쳐서 1000원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혼자 뛰면 100원이지만 5000만 명이 뛰면 50억이라고 작은 힘이 모여 큰 산을 이룬다 했다. 맞다. 내가 하루 걸으면 100원이지만 한 달 하면 3,000원이고 일 년 하면 36,000원이다. 적지 않은 돈이다.
출처: 캐시워크 홈페이지
하루 종일 걸어본다. 어린이집 등하원길. 마트 나들이. 놀이터 투어. 꽤 많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숫자 10,000 은 생각보다 너무 큰 숫자였다. 화폐 가치의 10,000은 손가락 몇 번 꼼지락거리면 1초도 안 걸리는 속도로 소비할 수 있는데 내 두 다리를 움직여 걷는 행위를 해보면 하루 종일해도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다. 만보 걷기가 생활이 아니라 운동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작정하고 오롯이 한 시간 이상을 걷기만 해야 볼 수 있는 숫자가 '10000'이다. 일상생활에서 걷기로 10,000을 못 채웠으니 다른 방법으로 채워야 한다. 핸드폰의 걸음 수는 반복적인 흔들림을 감지하는 센서에 의해 체크가 되니 굳이 걷지 않아도 손에 쥐고 팔을 냅다 흔들어대도 걸음 수가 올라간다는 원리를 이용한 똑똑한 엄마는 걷기 대신 팔을 흔들어대는 행동을 선택했던 것이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 아니 가족들이 보기에도 정상적인 행동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아서 구석에 숨어서 흔든다. 나는 팔뚝살도 만만치 않은 여자이니 팔 운동했다 치면 나쁘지 않다. 운동도 하고 돈도 벌었다. 그날도 불태웠었다. 나름 고단수라 걷기 앱이 네다섯 개는 된다. 비록 핸드폰 배터리가 빨리 소모되는 것 같고 몇 개의 걷기 앱에 나의 개인정보를 넘겨주고 아들에게 이상한 모습은 들켰지만 4~500원은 벌었다. 그래도 내 마지막 자존심은 자동으로 핸드폰을 흔들어주는 만보기 기계를 사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앱테크의 달인 흉내를 내며 열심히 흔들며 지내던 나날 중 어느 날 진짜 하루 종일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를 돌며 놀이터 도장 깨기를 해서 팔 운동을 하지 않고도 순수 걸음으로 10,000을 채웠다. 조금 있다가 앱에 접속해서 캐시들을 모아야지 해놓고는 삶은 시금치가 되어 결국은 그날 눈을 뜨지 못하였다. 그다음 날 날아간 피 같은 캐시들을 확인했을 땐 나 자신에 대한 한심 지수가 하늘로 치솟아버리고 온 만물이 짜증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500원에 인격을 파는 한심한 날이었다. 고작 500원에 어제의 나를 증오하는 현재의 나를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니 소름이 끼쳤다. 어제 내가 얻은 것은 엄마와 종일 시간을 보내 행복한 아이의 모습이었고, 두 손 꼭 잡고 걷던 가을날의 바람이었고, 낙엽의 바스락 소리에 까르르 거리던 내 아이의 웃음소리였는데. 이런 것을 얻어놓고 무엇을 잃었다고 나 자신을 증오했던 건지.
모든 걷기 앱을 지웠다. 회원 탈퇴까지 했다. 그동안 티끌처럼 모아둔 캐시들도 미련 없이 버렸다. 앱테크 그중에서도 걷기 테크는 정말 고단수가 해야 하는 영역이다. 혹시 캐시를 얻지 못할지라도 평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앱테크의 달인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500원에 인격을 버리는 나는 하수였다. 이런 하수가 이 영역에 발 들이면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티끌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러닝을 하기로 했다. 30분을 달리면 만보를 채우는 일은 너무나 쉽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나에게 캐시을 주지 않는다. 억지로 흔들며 채웠던 만보보다 바람과 내 숨소리로 채운 만보는 캐시보다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진정으로 중요한 건강과 우리 가족의 행복한 미래를 내 마음의 성장을 위해 달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