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19코스(역방향)

비바람 속에 올레 걷기

by 툇마루

2022년 11월 20일

19코스: 조천~김녕 올레/ 19.4km

날씨: 기온 15-17℃ , 종일 비, 풍속 3-6m/s

옷차림: 일 비 예보에 바람도 있어서 처음부터 비옷을 입고 걸었다. 바람에 따라 비옷 속에 입었던 등산용 재킷은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했고, 주로 긴소매 스포츠용 티셔츠에 비옷만 입었다.




바람이나 비 속에 올레를 걷는 것이 익숙해진 덕분에 날씨는 올레를 걸을지 말지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게 되었다. 단지 짧지 않은 올레길을 덜 힘들게 걷기 위해서 가능하면 바람 방향을 고려해 등 뒤에서 밀어주는 방향을 택해 걷는다. 그리고 코스 후반부에 쉴 수 있는 곳이 좀 더 많은 쪽으로 방향을 택하기도 한다. 몸이 지쳤을 때 제대로 쉬어주지 않으면 완주가 어려워지거나, 다음날 걷는 데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19코스를 걸으면서도 점심을 먹고 긴 시간 푹 쉬었는데, 덕분에 다시 걸으면서 서우봉이 보였을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만약에 좀 전에 우리가 푹 쉬지 않았다면, 저 언덕이 눈에 보이는 순간부터 올레를 제대로 즐길 수 없었겠지." 올레를 걸으면서 자주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걷는 중의 "쉼"에 대해서, 인생의 "쉼"에 대해서.


처음 고즈넉한 마을을 지나 코스의 절반은 거의 농로와 숲길이었다. 숲을 잠깐 벗어났다가 다시 숲, 또다시 숲이 반복되었다.

강한 비와 부슬 비를 반복할 뿐 비를 그만 뿌릴 생각은 없는 검은 구름 아래에서 종일 걸었다. 3분의 1쯤 남겨둔 지점에서는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우산을 뒤집는 바람까지 합세해 빨리 완주하고픈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는 날이었다.


(이 코스의 사진들은 보정 없이 그날의 어두움 그대로 올립니다.)



숲길을 걷다 보면 얼굴에 부딪히는 거미줄도 자주 만나지만, 20코스에서도 만났던 박노해 "걷는 독서' 문구도 만난다. 맘에 드는 짧은 글귀도 머리로 기억하기에 한계를 가진 나이라 우산 든 손을 옮겨가며 사진을 찍었다. 의자에 앉아 만나는 글과 길 위에서 만나는 글은 그 의미가 다르게 받아들여질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쪽이 더 좋고 덜 좋고 보다, 줄을 긋게 되는 문장이 다를 것 같은.



난데없이 나타난 넓은 잔디 운동장, 동복로 마을운동장이다. 그곳에서 중간스탬프를 찍고 마련된 정자에서 잠시 우산을 접고 쉬었다. 큰 대로를 지나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올레길을 잠시 벗어나 동복뚝배기 식당에 들렀다. 올레 길에서는 친절한 식당을 만나면 마구마구 소개하고 싶어 진다. 밥을 먹고 푹 쉰 후에 다시 걸어야 하는데 마음이 불편하면 쉬어도 쉰 것 같지가 않다. 19코스를 걸으실 때는 구좌읍 동복뚝배기를 기억하시길.

식당에서 나와 북촌포구를 지나면 멀리 우리가 넘어야 할 서우봉을 바라보며 걷게 된다. 서우봉을 배경으로 너븐숭이 4.3 기념관도 지난다. 제주 4.3의 흔적이 너븐숭이 기념관 외에 북촌포구에도 서우봉에도 남아있다.

서우봉을 오르기 직전 대문 틀은 있으나 문짝은 달았던 흔적도 없는 집을 만났다. "환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 순간만큼은 구중궁궐보다 멋진 집이란 생각으로 일부러 서너 발짝 다시 돌이켜 사진을 찍었다.



서우봉 낙조전망대에 올라 함덕해수욕장을 바라보는 풍광이야말로! 이 풍광을 보기 위해 19코스를 걷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너무 멀지 않은 때에 노을이 입혀지는 시간에 맞춰 다시 올라야겠다.

서우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급한 내리막 계단에다 울퉁불퉁한 내리막길이 이어져 있다. 한참을 내려가면서 순방향으로 걸은 올레꾼들은 이 길을 어찌 올랐을까 까마득했다. 하지만 오르기 힘든 곳은 늘 그렇듯, 서우봉은 보여주는 풍광뿐 아니라 품고 있는 곳곳도 아름다웠다.



함덕해수욕장 근처에 수많은 카페 중에 한산해 보이는 곳을 골라서 다시 한 시간 가량 쉬었다. 따뜻한 음료에 몸이 녹아 깜빡 잠이 들기도.

카페를 나와 함덕 바당올레를 걸으면서부터는 정말 제대로 바람을 맞았다. 우산이 뒤집히기를 수십 번. 마을을 지날 때는 또 괜찮았다가 또다시 바다를 만나면 여지없이 강풍이 몰아쳤다. 신흥리 백사장 전후로 펼쳐지는 바다와 그 길은 환상적이었지만, 우산을 아예 세로로 세워 들어야 해서 올레길에서의 풍광을 반밖에 보지 못해 아쉬웠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돌리면 우산 뒤집히기는 일쑤. 브런치 연재를 위해 최소한의 컷만 남겼다.

아주 작게 보이기 시작한 조천만세동산 기념비가 마치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을 만난 것 마냥 반가웠다. 비가 와도 걸을 수는 있는데, 비에 바람까지 더해지니 얼른 완주하고 숙소에 가서 쉬고픈 마음뿐이다. 그 생각이 걷게 하는 원동력이 될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거치는 지점인 만세동산을 통과해서, 이미 문을 닫은 올레 센터에 도착해 종점 스탬프를 찍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올레 리본을 찾아야 한다. 보통을 멀리서 펄럭이는 리본을 보면서 길을 찾는데, 비에 젖은 리본이 기둥에 감겨 붙어서 잘 보이질 않는다. 우리도 그 덕분에 두 번이나 길을 잘 못 들어 1km 남짓 더 걸었다. 그리고 비바람 속에서는 방수가 되고 비옷 모자 속에 쓸 수 있는 모자를 꼭 준비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