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닫은 상대가 있다.
지금보다 어릴 때는 상대가 나에게 잘못해서 나만 문을 닫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나도 상대방에게 잘못해서 상대방도 같이 문을 닫는다는 것을 안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랬을 것이다. 나만 속이 까맣게 탄 것이 아니라 상대도 그러할 거라는 걸 시간이 한참 지나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속이 까맣게 탔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몇 년이나 연락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외면>이라는 단어를 눈으로 읽으며 문득 그 일이 떠올랐고 대면해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적절한 때라고 이제는 괜찮을 거라고 이 타이밍에 용기가 생긴 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통화 버튼을 누를 만큼의 용기는 아니었기에 메시지로 마음을 전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오래 걸리지 않아 답신을 받았지만 곧바로 급하게 꺼낸 용기를 후회했다. "나는 이제 괜찮아. 서운한 것 다 잊었어." 나는 괜찮지 않았던 그 시간 동안 혼자 정리되고 편안했다는 그 말에 다시 생각이 깊어졌다.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했지만 한 달, 일 년...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생각이 피어오를 때가 있다.
그 당시에는 내 기분, 내 감정에 사로잡혀 상대방은 가해자, 나는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 부들부들 손이 떨릴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관계에서 또 다른 관계를 경험하며 이해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성장하면서 연락을 끊게 되기 전의 좋았던 감정들이 기억이 나고, 연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용기를 내기 전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던 그 시간 동안의 상대방은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에 대해. 상대방도 나처럼 '내가 너보다 더 힘들었어'라고 생각해 왔을 수 있다는 것. 그러하기에 다시 연락을 하고 싶어진다면 "내가 더 미안해"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까지 갈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상대의 답신이 어떠해도 괜찮다면 그때는 망설임 없이 전송 버튼을 누르자. 실상 통화가 이어졌을 때 다행하게도 내가 낸 용기에 대해 고마워하거나, 먼저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다. 용기를 낸 누구에게나 그런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다면 좋으련만.
상대에게 잘 지내라는 끝인사를 보내고 멍한 상태에 잠시 머물렀다. 정신을 차리고 더 준비된 용기여야 했다는 걸 알았다. 나 스스로 객관적일 수 있다는 착각으로 누가 봐도 내가 용서를 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꽤 긴 시간이 지났고, 내가 용기를 내어서 연락한 결과로 상대방은 <고마워> 할 것이라는 결론만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 번 따끔하게 관계를, 인생을 배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물 샐 틈 없이 닫고 있었던 문을 열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들어올 수 있을 만큼은 아니지만 빛이 새어 들어올 수 있을 만큼은 된다. 그 빛 덕분에 다른 편에 굳게 닫아둔 문에도 눈길을 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