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12코스

생이기정길 덕분에 행복하게 마무리하는 올레 12코스

by 툇마루
KakaoTalk_20251202_203450127_10.jpg 천천히 걸어도 방향만 잃지 않는다면 그곳에 도착합니다


걸은 날: 2025년 11월 30일

12코스: 무릉 - 용수 올레/ 17.5km (제주올레 홈페이지 www.jejuolle.or 참고)

기온: 14-17℃ / 구름 끼는 날씨가 이어진다고 했지만 주로 햇볕 아래 걸었다.

옷차림: 역시 배낭을 가볍게 해야 할 때는 빠르게 마르는 옷이 짐을 줄이는데 최고다. 어제저녁에 빨아두었던 짧은 소매 스포츠 티셔츠가 아침에 바싹 말라있어 이너로 다시 입고, 긴소매 스포츠 티셔츠, 간절기용 바람막이 재킷을 입었다. 모자와 선글라스, 무릎보호대는 역시 필수템.


숙소: 올레길을 걸을 때는 숙소에 머무르는 시간에 중점을 두지 않아서 무조건 가성비 숙소를 잡는다.

가성비 숙소 선택 기준은 첫 번째로, 저렴해도 침구가 깨끗하다는 평이 있는 곳을 잡는데, 쾌적하게 잠들어야 그날의 회복과 다음날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숙소 가까이에 식당이 한두 곳 있어야 한다. 다리가 많이 힘든 날은 샤워를 하고 다시 숙소에서 나와 멀리까지 저녁을 먹으러 가는 일은 쉽지 않다. 셋째로, 긴 올레 여행의 경우에는 세탁기가 있거나 가까이 빨래방이 있는 곳을 선택한다. 배낭을 가볍게 하는 것이 잠을 잘 자는 것만큼이나 걷는데 중요한 요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대한 올레길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 위치에 있는 숙소를 잡는데, 이번 올레 여행 숙소는 위치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날을 이어 걷는 올레여행의 경우 보통 한 코스가 마무리되는 위치의 숙소를 선택하는데, 이번에는 11, 12 두 코스를 걷기에 적당한 곳에 있는 가성비 숙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선택한 곳이 11코스 시작점인 하모체육공원이 있는 쪽인데, 거기서도 800미터를 더 걸어야 하는 "호텔 52"였다. 1박에 5만 원이라 가성비면에서 아주 훌륭했다. 바로 앞에 바다가 보이고, 방도 넓고, 화장실도 깨끗했다. 하지만 블로그에서 보았던 설명 중에 1층 카페는 운영을 하지 않고 있었고, 외관이 많이 낡아있어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카운터에 앉아계신 주인장은 친절하게 맞아주셨고, 우리의 숙소 선택 기준 첫 번째, 두 번째에는 어느 정도 들어맞는 곳이라 나쁘지 않았다.




바람도 기온도 올레꾼에게 제대로 맞춘 듯한 아침, 숙소에서 택시를 타고 무릉외갓집으로 이동했다. 무릉외갓집은 올레 여행이 아니라면 꼭 한 번 머물러 야외에서 차를 한 잔 하고 싶은 곳이다. 폐교를 활용한 곳인데 겨울이었음에도 그 건물과 운동장의 어울림에 발을 떼기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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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외갓집


배낭이 있는 날과 없는 날의 컨디션은 달라도 그리 다를 수가 없다. 솔직히 배낭을 메고 걸을 때는 진정으로 걷는 사람 같은 모양새를 갖춘 것 같달까. 딱 그 정도의 정서와 사진을 남겨주는 정도다. 하지만 숙소에 배낭을 두고 걷는 날은, 전날 메고 걸었던 배낭의 무게 그 이상으로 걸음이 가볍다.


무릉외갓집에서 출발해서 걷다 보면 넓게 트인 밭뷰가 펼쳐진 길이 이어진다. 그러다 도원연못이라고 적힌 간새가 나오는데, 처음엔 하나인 줄 알았던 연못 옆에 또 하나의 연못이 나란히 놓여있다. 원래 하나였던 연못이 나뉘었는지 처음부터 두 개였는지 궁금해지는 모양새였다. 녹남봉을 바라보며 가볍게 걷다 보니 어느새 녹남봉을 올라 나무로 만든 전망대가 눈앞에 있었다. 다리가 힘들어지기 시작했지만 계단을 올라 전망을 누렸다. 꼭 올라가서 제주의 풍광을 누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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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생태연못과 녹남봉에서의 전경


식당, 카페: 올레길을 걸을 때 중간 스탬프를 찍는 곳과 점심시간이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 12코스도 그랬다. 하지만 12코스도 11코스와 마찬가지로 식당이나 카페가 적은 편이다. (신기하게도 코스가 끝나는 지점에 쉴만한 카페들이 몰려 있는 경우가 많다.) 처음 우리의 계획은 "믈커피로스터스"라는 카페에서 커피와 디저트로 점심을 채워볼 예정이었다. 하지만 문 앞에 붙여둔 종이에는 서울 출장으로 당일 휴업이라는 안타까운 메시지가 적혀 있었고, 쓰디쓴 마음으로 다시 온 길을 되돌아 "도원올레"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 정식이라는 메뉴로 통일해서 식사가 나오는 곳인데, 근처에서 일하시는 주민분들이 와서 점심을 드시는 식당인 것 같았다. 그 속에 드물게 올레꾼도 몇몇 보였다. 그리고 카페인의 아쉬움을 채워보려 그 이후로 계속 눈을 크게 뜨고 걸으며 카페를 찾았지만 (지도상에 없는 카페들도 가끔 있으니까) 어렵게 만나는 카페 두세 곳이 줄줄이 아예 영업을 종료한 카페들이었다. 그러면서 육지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제주의 상황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대도시는 점점 더 흥하고 지방은 점점 더 기울어져 가는 것처럼, 제주 안에서도 관광객이 과하게 몰리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온도차가 너무 커 보였다.

걷는 동안 햇볕이 뜨거워 시원한 음료가 절실했던 우리는 올레길을 꽤 벗어나 있는 작은 카페를 찾아가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며 땀도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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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에너지를 충전한 덕분인지 멀리 보이던 수월봉이 성큼 빠르게 다가왔고, 예전에 여행지로 들렀던 수월봉을 올레길 위해서 만나니 또 다른 반가움이 있었다. 수월봉 아래에서 시작되는 엉알길을 조금 걷다가 감탄만 하고 돌아간 적이 있었는데, 차귀도가 놓인 바다와 봐도 봐도 신비로운 지질트레일 코스를 양쪽에 두고 끝까지 걸어보는 감상이 어찌나 좋던지. 12코스를 짧게 걸어보려면 엉알길과 생이기정길만 걸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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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알길을 뒤로하고 12코스의 마지막 봉인 당산봉을 오르기 전 차귀도 포구에 다 달았다. 그곳에서 그간의 카페 없음으로 인한 아쉬움을 달래주고도 남을 휴식 시간을 가졌는데, 어떤 화려한 장소도 아닌 노상에서 맥주 한 모금과 반건조 오징어를 먹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이었다.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보아 유명한 곳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 부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휴식처를 만나 신기루를 발견한 기분이 이런 걸까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3km를 더 걸어야 했기에 맥주는 목을 축이는 정도로만 마실 수밖에 없었다. (걸은 지 20일 정도 지난 지금 12코스를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기억이다.)


지도상으로는 당산봉을 둘러가는 것처럼 보여서 오르막길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걸었는데, 당산봉을 어느 정도 오르는 코스였다. 계단을 오르며 작은 생명이 가진 또렷한 그림자를 발견하고, 어둡게만 생각되는 그림자가 오히려 생명을 더 빛나게 해주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이기정길. 재미없던 영화도 결말이 좋으면 앞부분의 재미없음이 모두 용서되는 것처럼 12코스에 대한 모든 기억을 포장해 주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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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봉을 오르며 발견한 생명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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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기정길 풍광


생이기정길 끝에는 사진을 찍고 있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꽤 많았고, 들어가고 싶은 카페들도 꽤 많았다. 일반적인 여행으로 다시 이곳에 온다면 생이기정길을 걷고 반드시 맛 좋은 커피를 마시리라 생각하면서 용수포구로 이동해 도착 스탬프를 찍었다.

택시를 불러서 숙소로 이동한 후, 샤워를 하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멀리 걷고 싶지는 않아서 슬리퍼를 끌고 호텔 바로 옆 식당에서 푸짐한 저녁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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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걷는 걸까 묻고 답하고 또다시 묻고. 때마다 답이 다르지만 이번에 올레를 걷고 와서는, 길 자체가 해결해 주는 비움 때문이었다. 셀프로 뇌를 비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지만, 길을 걷다가 보면 비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힘든 길일수록 더욱.

스스로 하는 것은 그저 걷는 것뿐이지만 걷다 보면 길이 주는 축복. 이것이 반복되면서 오래 걷기에 중독이 되어가는 것 아닌가 싶다. 걷다 보면 발가락이 아파오기도 하고, 발목을 접질리진 않을까 신경 써서 걷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서울에서 이고 지고 왔던 고민은 발가락 보다 더 작아져있고, 저녁이 되어서 다시 그 고민을 꺼내보면 이 조그만 발가락 하나에도 못 미치는 고민이었구나 싶어진다.

그리고, 쉬는 맛을 더 진하게 느끼려고 걷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걷다가 만나는 휴식처, 걷다가 먹는 밥, 걷다가 마시는 커피는 자동차로 이동해서 만나는 것과 비할 바가 아니다. 그 맛 또한 중독성이 강하다.

또다시 왜 걷는 걸까 물을 때가 있을 것이고, 아마 또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 대답들을 차곡차곡 쌓다 보면 가장 진한 나만의 답이 나오겠지. 그 진함을 잘 담아서 그때의 나로 새로운 글을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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