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베프는 약간의 나이 차이가 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 그 친구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고작 고만큼의 차이.
지난 겨울 함께한 여행 중에 물었다. 너랑 나랑은 성격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다른 게 많은데, 성격, 성향, 취향 이런 것들 중에 뭐가 비슷해서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걸까.
나의 우문에 내 젊은 친구는 현답을 내놓았다. 다른 점은 많지만, 그런 것보다 우리가 지키는 선이 비슷해서 그런 것 같아.
곧바로 수긍되었다. 넘나드는 선의 기준이 다르면 그것처럼 힘든 게 없다. 반대로 그 기준이 비슷하면 그것처럼 편한 게 또 없다. 생각해 보면 그간 정리된 관계들 대부분이 (아마도 모조리) 그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한때 상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을 겪으며 상식이라는 이름이 잘못 지어진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가진 상식이 20년을 함께 산 남편의 상식과도 같을 수 없고, 생의 처음부터 나와 함께한 아이조차도 내 상식과 같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사회에서 만나는 각 사람의 상식이란. 각 사람의 상식은 높이도, 색깔도, 두께도, 경도도 모두 다르다는 것을 몸으로 겪으며 알았다. 그전엔 참으로 순진하게도 모오오오든 사람에게 상식은 당연히 같은 거라 생각했다. 어른이라고 일컬어지는 나이가 지나도 한참 지났을 무렵까지도.
상식에 다른 이름을 짓고 싶었다. 각 사람의 경험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경식(經識), 각 사람의 독자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라면 자식(自識) 등과 같은 이름이면 어떨까. 베프 사이에도 때때로 상식이 경식이 되고 자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그 높이나 경도를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여서 관계 유지가 가능하다. 바라기는 나의 상식-경식, 자식-은 몸의 나이가 드는 속도보다 느리게 늙어갔으면 좋겠다. 베프뿐 아니라 내 아이 세대가 주축이 될 공동체에서도 선을 넘는 할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다. 자주 걷고, 자주 읽고, 자주 들으며 선을 배우고 지킬 것이다. 단절을 위한 선이 아닌 연결을 위한 선을 긋는 일이길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