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폴 오스터는 하루에 6시간씩 글을 썼으며 주로 만년필과 타자기만을 사용했다. 헤밍웨이는 주로 연필로 글을 쓰거나 서서 타자기를 이용했다. 연필로 글을 눌러쓰는 소설가 김훈의 손글씨를 적용해 만든 폰트인 ‘김훈체’도 있다. 문학관에 가서 작가들이 펜과 연필로 원고지나 노트에 꾹꾹 써간 것을 보면 경외감이 들곤 한다. 만약 내가 연필로 글을 써야 하는 조건 속에 있다면 작가가 되는 건 요원할 수밖에 없었겠다. 나는 글씨를 잘 쓰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글씨에 별로 자신이 없었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보면 마냥 부럽기만 했고 습관적으로 나의 글씨체를 숨기곤 했다. 물론 작가라고 해서 악필이 없었던 건 아니다. 소설가 최인훈은 악필로 유명했는데 신문 연재 당시 그의 글씨를 해독하는 기자를 따로 두기까지 했다. 아마 내가 그런 조건 속에서 글을 써야 했다면, 분명 나의 글씨를 해독해야 할 사람이 여러 명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책 몇 권에 인사말을 적어 함께 사는 U에게 전달했다. U의 지인 몇에게 책을 보내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책들을 받아 든 U가 대봉투에 책을 받을 사람들의 주소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펜으로 주소를 적어가다 말고 U가 문득 묻는다.
“어렸을 때 글씨 쓰기 연습 안 했어?”
나는 경험적으로 U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 책 앞장에 적어둔 내 글씨를 보고서 하는 소리일 거다.
“바른 글씨 배우는 학원이나 하다못해 서예원이라도 다녀보지 그랬어.”
U는 농담이라는 듯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은근 부아가 돋기 시작한다.
“왜? 책 앞에 써놓은 글씨가 이상해서 그래?”
하지만 되묻는 나의 목소리는 떨려오고. 글씨는 언제나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니까. 그래도 나름 정성 들여 쓴 건데 그런다.
“아니 막 그런 건 아닌데 아쉬워서. 조금 더 반듯하게 쓰면 좋으련만” 하고 U가 씩 웃는다. 겨우 그런 거 가지고 막 열받고 그런 거 아니지? 묻는 듯한 표정이 약간은 얄밉고.
“이거 봐. 나 꽤 잘 쓰지?”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U가 봉투 위에 주소를 일필지휘로 휘휘 써나간다.
“나는 갈겨써도 이 정도인데 말이야.”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이 써놓은 글을 U가 자랑스레 내려다본다. 부아가 치밀고 얄미운 감정이 들긴 했어도 그녀가 써놓은 글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글씨 하나는 정말 잘 쓰는구나 싶었다. U는 어렸을 때 동네 서예 학원에서 글씨를 익혔다고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런 곳을 조금이라도 다녔어야 했나.
“그래도 나, 글씨 아주 못 쓰는 건 아닌데.”
나는 항변하듯 대꾸한다.
“못써.”
U가 단정 지어 말했고, 나는 두 손을 들고 만다. 머리 한 편에서 불끈 솟은 빡침이 뭉근히 퍼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가끔 사람들한테 책 전해주면서 남편 글씨를 잘 못 알아봐도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할 때 있는 거 몰라? 천재는 악필이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U가 말끝을 흐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천재는 악필이라는 말은 차라리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다. 괜히 속만 뒤엉켜졌다. 나는 늘 내 글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래도 그것 때문에 큰 불편을 겪거나 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작가가 되고 나서는 그게…… 좀 다른 문제였던 것 같다.
이 모든 게 언제 시작되었더라. 아마 몇 년 전 첫 책을 낼 때부터였던 것 같다. 책을 막 출간한 후 출판사를 방문하기로 한 전날 출판사 편집자로부터 이메일을 한통 받았다. 출판사에 방문하는 겸 해서 사인본 작업도 함께 이뤄졌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사인본이라니. 결재 서류나 관공서, 계약서 같은 것에 흘려 쓰듯 한 거 말고는 정말 제대로 된 사인이라고 할 게 없던 내가 공식적으로 누군가를 위해 사인을 해야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 같았다. 갖은 핑계를 대서라도 출판사에 가지 말까 생각을 잠시 했던 것도 같다. 사인뿐만 아니라 뭔가를 적긴 적어야 할 것 같고, 하다못해 받는 이의 이름 한자라도 써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이르자 영영 감추고만 싶었던 콤플렉스인 나의 글씨체가 떠올라 난감해졌다. 내 엉성한 사인과 알아볼 수 없는 글씨를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자…… 얼굴이 달아오르고 연신 초조해졌다.
하는 수 없이 그날 밤을 거의 다 새울 정도가 되도록 사인과 글씨를 연습했다. 싸인은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춰가는 것 같았지만 글씨체는 영 어색했다. 집에 있는 책들이란 책은 다 꺼내놓고 앞장에 직접 사인과 글씨를 쓰는 연습을 해 보았어도 도무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고. 황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살아왔다. 평생 공적 사인 말고는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아주 근사한 사인과 글씨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그때 언제 다가왔는지 곁에서 U가 근심 어린 얼굴로 지켜보고 서 있다가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또박또박 한 획마다 제대로 쓴다고 생각하고 써 봐.”
그런 말은 초등학교 때나 듣는 말 아닌가 싶었지만 별 수 없었다. 계속 써보는 수밖에 나는 몸을 반쯤 돌아 앉아 등으로 U의 시선을 가린 채 다시 펜으로 글을 써가기 시작했다.
여하튼 출판사를 방문한 운명의 날. 간밤에 연습한 대로 맡겨진 책들에 불완전하게나마 사인과 간단한 문구를 적어 놓았다. 그런데 내 글씨를 슬쩍 훔쳐본 편집자가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하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걱정할 만한 건 아닌 거 같아요.” 편집자가 대수롭지 않게 말해준 덕에 나는 그날 겨우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아마도 편집자는 내가 글씨를 잘 쓰지 못했어도 정말 그렇다고는 말해줄 수는 없었겠지. 역시 편집자는 작가의 빈틈을 잘 이해해 주고 이끌어 주는 존재.
그날은 무사히 넘기긴 했지만 사인본 작업을 하는 건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강의를 하거나 독자를 만나는 자리, 온라인 서점 이벤트나 지인들에게 책을 보낼 때도 하나같이 책에 사인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유명한 작가도 아닌데 사인본씩이나 필요할까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책 한 권을 받더라도 작가의 사인이 들어간 것을 원했다. 작가가 유명하거나 인기 작가라서가 아니라 그런 방식을 통해 책을 의미 있게 소유하고자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사람들의 그런 마음을 알아가자 나는 글씨가 더 신경 쓰였고 왠지 모를 미안함과 송구한 마음이 커져만 갔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있었다. 비록 글씨를 잘 쓰지 못하더라도 최대한 상대방에게 진심 어린 글을 써서 건네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이후 한 번은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약 70여 명 가량이 모여있는 자리였는데, 강연을 마친 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사인을 해줄 수 있는지 요청했다. 올 것이 왔고,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승낙했다.
사인이 시작되고 나서 학생들이 내 앞으로 길게 줄을 섰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책에 사인을 할 때마다 그이의 이름과 개별적인 특징을 캐리커처처럼 포착해 함께 쓰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수줍음을 타느라 말을 못 하고 친구들이 얘는 시를 좋아해요,라고 대신 말해준 한 친구에게는 시인이 꿈인 OO 님이라고 시작되는 글을,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 주었지만 쑥스러움에 대답을 잘하지 못한 친구에게는 과묵하지만 잘생긴 OO님이라고 시작하는 글을, 또 누군가에게는 속에 많은 것을 품고 있는 것 같다는 말로 시작하는, 모두에게 각각 다른 글을 적어주었다. 사인을 다 끝마치고 나서는 손가락뿐만 아니라 팔까지 저려 왔다. 그래도 할 수 없었다. 나의 못난 글씨를 상쇄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을 내는 수밖에. 내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의 성의와 진심은 알아주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한 사람씩 마음을 담아 전하고 나면 미안한 마음이 괜찮아지곤 했다.
어떻게든 고치려고 해 보았지만 글씨에 관한 콤플렉스는 극복할 수 없었다. 지금 이대로의 글씨로 계속 어디서든 써 나가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전과 다르게 한 가지 바뀐 게 있다면 내 글씨를 더 이상 부끄러워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글씨를 잘 못 쓰는 대신 더 정성을 들인 글을 써서 상대방에게 전한다. 오늘 U는 내게 핀잔 어린 말을 하긴 했지만, 그녀 역시 각각의 책 앞장을 채운 서로 다른 글을 보았을 것이다. U는 내게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겠지 싶은 게 있다. 어쩔 수 없이 자주 글씨가 엉망이 되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든 내 글이 언제나 진심으로 닿기를 바라는 그 마음만큼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