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라는 이름의 도박판.

by 조민성

참 교육.


얼마 전 센터로부터 ARS 조사 전화를 받았다.


몇 년 전에 농장을 준비하며 센터에서 받았던 교육에 대한 조사였는데 여러 질문들이 오가고 마지막 질문이 '어떤 교육이 가장 유익했느냐?'였다.



난 주저 없이 어느 농장의 사례를 꼽았다.


센터 실습과정 중에 방문 계획이 잡혀있던 그 농장은 깊은 산속 몇만 평이 넘는 부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거대한 식물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는 실패사례입니다."


잘못 들었나 싶은 나에게 담담하게 내뱉은 사장님은 이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 농장은 이미 10년째 준비 중이었으며 들어간 자금만 이미 40억 원이 넘어간 상태였지만 허가 문제와 자금 문제로 공사 기간은 점점 길어졌고 급기야 기존에 완성했던 구역들까지 망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품종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들여왔던 비싼 식물들은 환경과 맞지 않아 반 이상이 죽어버렸고 무심코 손댔던 지형은 토사가 일어나 다시 돈 들여 복구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라고 했다.


이제까지 투자한 게 아까워 계속 이어가고 있지만 얼마나 더 갈지는 모르겠다며 그동안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게 이렇게나마 창업교육의 한 부분을 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몇 년 전이지만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데 다른 교육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던 내가 그날 밤 집에서 그동안 짜고 있던 계획들을 늦은 시간까지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농장의 수명.


어느 농장이 더 이상 운영하기 힘들어졌다는 건 재정적인 여유가 더 이상 없어졌다는 뜻인데, 이 부분은 사실 어느 날 갑자기 대단한 문제에 부딪혀 생긴 게 아니라 장기적인 저소득으로 인해 기본적인 단위의 생활이 어려워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농업은 어느 특정 작물을 재배하게 되면 수익이 나는 계절이 한정되어 있거니와 실상 수익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 수익의 일정 부분이 고스란히 재투자되지 않으면 다음 수익을 기대하기 힘들다.



흔히 어느 사업이든 겉으로 보기보다 실제 수익이 나지 않는 상황을 '뒤로 깨진다'라고 표현하는데 농업은 이 표현이 정말 생활화되어있다.


앞서 이야기했던 농장의 사례는 시작도 하지 못한, 거의 최악의 사태라고 할 수 있는 극단적 사례지만 대부분 개업까지는 가까스로 해내고 진짜 문제는 그다음부터 생긴다.


개인 규모의 농장에서는 거의 필연처럼 따라다니는 악순환이 있다.




악순환의 시작.


전업 농부의 악순환이 시작되는 건 대개 비슷한 패턴인데 경험자들에게는 굉장히 불편한 기억이다.


우선 시작은 이렇게 된다.


- 농장에 대한 구상을 시작하고 필요한 정보들이 모이면 전업을 결심한다.


- 모아둔 돈과 융자로 부지, 시설, 모종 등 기초 기반에 투자한다.


- 이왕 새로 시작하는 건데 집도 예쁘게 짓고 장비들도 반짝반짝한 걸로 준비한다.


- 모종이 자라 상품가치가 생길 때까지 주변을 돌며 고객들을 미리 확보한다.



이때까지는 아직 크게 와 닿는 게 없으며 오히려 큰 희망에 부풀어있다.


꽃의 경우 꽃이 피기만 하면 뭔가 자신의 인생도 장밋빛이 될 것 같은 근본 없는 기대감으로 모아뒀던 돈을 서서히 갉아먹으며 꽃이 피는 계절을 기다리게 된다.



드디어 기다리던 계절이 오고 모종은 훌륭한 상품이 되어 나갈 준비를 끝내는데 이제 여기서 위기가 한번 온다.


- 상품은 언제든 나갈 수 있는데 갈 데가 없다.


- 주변 지인들이 사가는 양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 계절이 지나가기 전에 얼른 팔아야 하는데 재고는 그대로다.


-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판매가를 올리니 그나마 있던 주문도 뚝 끊긴다.


- 다급한 마음에 금액을 낮춰보지만 오히려 주문은 더 줄어들고 먼저 사갔던 사람들의 항의가 생기기 시작한다.


- 장부엔 결국 마이너스를 기록한다.


- 멘탈이 깨지기 시작한다.


여기 까지라면 '아 내가 이번엔 실패했구나'하고 국밥 한 그릇에 쓰린 속을 달래 보겠지만 이제 시작이다.





"돈 잃으면 속 쓰린 법이라며." - 고니


아직 쓰린 속을 달래지도 못했는데 연말이 다가오면 갑자기 기다렸다는 듯 별의별 문제들이 다 들이닥친다.


- 남은 재고를 보관할 공간이 없다.


- 창고를 새로 지을 돈도 없다.


- 대출 이자 내는 날이 가까워진다.


- 내년 농사 지을 준비를 해야 하는데 인건비가 없어서 혼자 해야 한다.


- 농장에 관련된 각종 세금 내는 날이 다가온다.


- 금액을 다 정리하고 나니 내년 모종비가 없다.


- 잘 생각해 보니 다음 달 생활비도 빠듯하다.



생활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이때부터 사람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한다.


온갖 고민과 걱정거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슬슬 집안 식구들에게 히스테리가 시작된다.





"돈이라는 게 독기가 세거든." - 곽철용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무모한 행동으로 인한 가장 큰 대가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본인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더 많이 받는 것 같다.



특히 가장 가까운 가족들은 당사자의 스트레스와 더불어 당사자가 새로 창조해내는 스트레스까지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태풍 속에서 지내게 된다.


- 왜 휴지를 다섯 장씩 뜯지? 세 장이면 되지 않아?


- 무슨 일 했다고 밥을 두 그릇씩 먹지?


- 카페에 갔다고? 모종 살 돈도 없는데?


- 화장실 불 누가 켜놨어?


- 피곤해서 쉰다고?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 놀러 가자고?


결국 이런 흐름은 화살이 되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고 가족을 넘어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퍼지게 되면 정말 하루하루가 고달파진다.



여기서 멘탈이 박살나 논밭 다 뒤엎고 앞으로는 농사의 농자도 안 꺼내고 살면 게임이 끝나지만 대개는 여기서 살짝 이상한 흐름으로 가기 시작한다.




"묻고 더블로 가." - 곽철용


도박으로 돈을 잃은 사람은 과연 실제로 돈을 잃기 시작했던 순간이 언제일까?



바로 처음으로 큰 대미지를 입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따고 잃고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큰 대미지를 받으면 겁을 먹고 그만둘 것 같지만 오히려 돈을 딴 사람이 만족하고 돌아서는 경우는 많아도 큰돈을 잃은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희한하게 사람 심리는 손실이 생기면 그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더 큰돈으로 베팅을 시작한다.


이때는 이미 멘탈에 금이 간 상태로, 금세 또 돈을 잃게 되고 멘탈이 회복 불가 수준으로 떨어지면 비정상적인 판단들을 내리기 시작한다.



사기꾼이 가장 사기 치기 좋은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사업으로 손실을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다.


방금 전에 실패를 겪은 사람은 자신이 입을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돈만 된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나는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송이버섯이 나온다며 휴전선에 길도 없는 산을 사는 경우도 봤고, 농장이 잘 안되자 눈썰매장을 만들겠다며 갑자기 대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사람도 봤다.



올초까진 귀농해서 표고버섯을 재배하던 사람이 표고버섯이 안 팔려 생활이 어려워지자 싹 밀고 호두나무를 심으려는 걸 쫓아다니며 말렸었다.


표고버섯은 재배 기간도 짧은 편이고 전골처럼 흔한 음식에 들어가기라도 하지 호두나무는 수확량이 받쳐줄 정도로 크려면 7년은 키워야 되는 데다 그나마도 국산은 비싸다고 안 사 먹는다. (본인도 안 먹는다)


그리고 견과류를 먹어봐야 하루에 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있는 힘껏 반대했지만 결국 이 분은 자신에게 남은 모든 재정을 모두 끌어모아 호두나무를 심었는데 연락이 끊긴 지 벌써 몇 달 됐다.




"노름꾼 팔자엔 재물이 없지." - 고광렬


돈만 있다고 농장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지만 농장을 운영하는 데에는 최소한의 운영비라는 게 있고 농장의 수명은 이 운영비에 좌우된다.


생각보다 작은 걸음들이기도 하고 꾸준함이 필요한 비용이다.



농장을 차리기 전 크고 작은 일들도 해보고, 농장이던 회사던 예전부터 주변에 사업하시는 분들을 쭉 봐온 결과, 사업이 도박으로 바뀌는 순간부터 미래가 불투명해진다.


운이 좋아 갑자기 돈을 버는 경우도 있지만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가는 법이라 오래가는 경우를 못 봤고, 결국 잃고 나서 모든 걸 깨닫게 되더라도 한번 마음이 다치면 재기가 어렵다.


농장 운영은 작고 꾸준한 걸음들이 필요한 법인데 꽃이 딱 한번 피고 지는 걸 보면 화투라는 도박의 이름은 참 잘 지어진 것 같다.



숲은 철저히 'Build up'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필요한 행동과 결과만을 쌓아가며 세를 불려 간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품종 하나 정하는 데도 이게 과연 뒷감당이 되는 일인지, 혹시나 내가 가능성에 베팅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몇 번이고 물어본 후에야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건, 생각도 해보지 않고 내린 결정은 잘되던 못되던 결국 독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올바른 결정만을 지겹도록 선택하며 쌓아가다 보면 어느새 돌고 도는 나선 속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숲이니 꽃이니 도박이니, 이런 이야기들이 한데 섞이면 누군가에겐 뜬구름 같은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그걸 매일같이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피부로 느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취미가 직업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