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천천히 피었으면
여름
by
조민성
Jul 8. 2020
아래로
농장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무슨 꽃이 피었을지 알고 있다.
꽃을 꼭 눈으로 보지 않아도 여러 가지가 말해준다.
노랑원추리
계절, 온도, 습도, 향, 나뭇잎의 색깔 그리고 기억.
어쩜 그렇게 한순간도 거르지 않고 정해진 순서를 따를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어느 계절에는 내 사무실이 꼭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새로운 꽃들이 피어나는 속도는 너무 빨라 내 사무실이 멈춰진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 쌓여있던 톱밥들이 물을 먹어 바닥을 녹이고 있었다.
숲 속에서 일하다 보면 한 시간 한나절을 알아채긴 힘들지만 계절은 매 순간 숨을 통해 내가 얼마나 느린지 알려준다.
노루오줌
노루오줌이 피는 7월은 온도가 높고 습해 숲 속의 균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다.
농장 곳곳에 노루오줌의 꽃이 보일 때면 쌓아둔 목재들을 뒤집어줘야 한다.
장마철이면 그동안 쌓여있던 낙엽이니 나뭇가지들이 한 번에 썩기 시작한다.
여름의 숲은 그렇게 스스로를 집어삼키고 또 커나간다.
습이 고여 문제가 될만한 곳을 돌며 손을 봤다.
그대로 두면 내가 짧은 시간 동안 만들어놓은 부자연스러움은 한해를 채 못 가고 이전으로 돌아간다.
헬시언
일찍 꽃을 피운 호스타들을 보며 불안한 마음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호스타의 꽃들은 8월까지 핀다.
호스타 꽃들이 지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이 꽃들이 지고 나면 나도 여름을 정리해야 한다.
앞으로 남은 꽃들이 얼마 없다.
보고 싶은 꽃들을 다 보고 나면 한 해가 끝난다.
괜히 조급해진 마음만 안고 산을 내려왔더니 더덕밭 아저씨가 웬일로 트랙터를 몰고 와 길 중간을 채우고 있었다.
세월아 네월아.
꽃이 얼마나 빨리 피고 지는지 모르시나 보다.
영원히 나가고 있을 것 같던 아저씨는 한참 후에야 나를 발견하고는 내가 빠져나갈 공간을 만들어주셨다.
내가 숲보다 느린 건 불협화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삐걱삐걱.
keyword
포토에세이
숲
여름
10
댓글
댓글
0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작가에게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조민성
소속
농장주
직업
에세이스트
숲 속에서 야생화를 가꾸고 있습니다. 5.6헥타르의 숲 속에서 생기는 사람과 식물, 동물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팔로워
202
제안하기
팔로우
작가의 이전글
어느 날 어느 통화
집에 안 가니
작가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