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에세이] 서태지는 왜 신곡을 내지 못하는가?

—신곡 없는 서태지와 케이팝의 시대

by 최우주

[음악 에세이] 서태지는 왜 신곡을 내지 못하는가? (뇌피셜) (2024.12.16.)

—신곡 없는 서태지와 케이팝의 시대



<1> 망글 기원


2024년도 저물어 간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서태지는 또 한 번 근황을 올릴 것이다. 작년의 그는 “특별한 계획 없이 한 해를 지내다 보니 내년엔 더 많은 꿈을 꿔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고 밝혔지만, 그런 2024년도 곧 작별이다. 연말연초의 다짐은 작심삼일하는 것이 국룰이라지만, 이를 또 반복한다면 슬플 것이다. 딸의 성장을 비롯한 근황 소식도 좋지만, 모호한 “더 많은 꿈”같은 소리 말고 다른 얘길 들었으면 한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부디 신곡 소식을 전해서 내 글이 망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2> 최신 인기가요 모음집


나는 늘 음악을 들어왔다. 막내 삼촌과 방을 같이 쓰며 성장했던 터라 삼촌이 즐겨 듣던 이문세, 신승훈 그리고 누구 곡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클래식 따위를 들었다. 아마 김건모도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도 멜론탑100은 챙겨 들었는데, 당시 그것은 매주 발매되던 ‘최신 인기가요 모음집’이었다. 몇몇 회사가 그 ‘짬뽕’ 테이프를 발매했는데, 나는 문방구에서 그걸 샀다. 아마 불법 짜깁기 음악 모음집이었을 것이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SM의 아이돌인 H.O.T 노래를 열심히 듣게 되었다. 내가 그들의 팬이어서가 아니라, 옆집에 살던 누나가 그들의 열혈 팬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고를 다니던 누나는 얼마 전까지 김원준의 팬이었는데, H.O.T가 나오면서 이별의 과정을 거쳤다. 그것은 어린 내게 신비한 일이었다. 누나는 다른 남자에게 끌리는 마음에 안절부절못했고, 죄책감을 느꼈으며, 심각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러 가 보니 누나의 방이 H.O.T의 강타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었다. 건강한 이행에 성공한 셈이었다. 아무런 생각이 없던 나는 두 가수를 동시에 좋아하면 왜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지금도 그러하다. 어쨌거나 그러니 내가 하고픈 말은, “가수들이여- 팬심의 소중함을 각별히 새길지어다!”



<3> 글로벌스탠더드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은퇴한 서태지가 컴백했다. 나는 늘 음악을 들어왔는데, 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이 되었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을 때, 대한민국의 청소년이 느낀 것이 이런 것이었을까?


서태지가 등장하기 전에도 우리 가요계는 풍성했다.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런 믿음에 반기를 드는 몇몇 불신자 혹은 이단이 등장했는데, 그중 하나가 서태지였다. 1987년에는 우리나라도 민주화가 되었고, 바야흐로 세계화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한국 가요계는 트로트와 같은 성인가요풍이 지배하고 있었고, 서태지는 이것이 별로였다. 그는 그동안 국내에서 쉬이 접할 수 없던 음악과 문화를 적극 도입하면서 싹수가 노랗고, 불순하며 사악하다는 기성세대의 평가를 받는다. 이런 취급에 대해 서태지는 이렇게 항변하고 싶지 않았을까? “저기요, 이게 글로벌스탠더드라고요!”



<4> 케이팝의 시초


서태지는 팝뮤직과 힙합을 기반으로 한 리듬의 댄스 음악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현시대의 한국 대중음악 스타일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 받는다. 서태지에게 한국 가요계는 갈라파고스와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글로벌 음악씬의 흐름에 부합하는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가 내는 신곡들은 참신하고 대단했지만, 세계적으로는 이미 큰 인기를 받고 있는 장르였다. 물론 서태지는 그 과정에서 우리 고유의 소리와 리듬을 접목하여 독특한 결과물을 만들었다. 그 덕분에 케이팝의 시초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사실 1992년의 나는 너무 어렸고, 그런 내게 서태지의 음악은 어려웠다. 학교에서 제일 잘나가는 형들은 서태지의 노래를 커버하며 소풍날의 스타가 됐지만, 나는 그보다 흥국이 아저씨의 ‘아싸~ 호랑나비’를 더 좋아했다.


늘 음악을 들어왔지만, 서태지 음악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린 귀는 어른의 귀와 닮았고, 그가 구현하는 음악은 너무 젊었다. 한 인터뷰에서 서태지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가장자리에 서 있는 음악이다. 누구나 듣기 좋은 음악을 굳이 내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2000년 컴백 인터뷰 中)


서태지의 음악은 글로벌스탠더드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결국 그가 추구하는 것은 그 세계의 복제가 아니라 확장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서태지의 음악을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음악이 영적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건 해방이었으므로 위험했고 찬란한 것이었다.



<5> 음악의 민주화


서태지 영접 이후 나는 ‘최신 인기가요 모음집’ 밖으로 나갔다. 그 여정은 위대한 항로였고, 듣도 보도 못한 사운드의 항연이었으며, 무엇보다 그 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별자리를 만드는 기쁨을 누렸다.


시간은 또 흘렀다. 테이프는 CD가 되었다가 MP3가 되었고, 이제는 스트리밍이 됐다. 그 변화는 음악이 민주화되는 과정이었다. 과거의 우리는 각자의 안타까운 주머니 사정을 알기에 우애를 다지며 테이프를, CD를 교환하며 함께 음악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음악은 해방됐다. 더는 친구의 순번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D-Day에 음반숍에 가서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 이제 우리는 단 돈 몇 만 원으로 모든 걸 누릴 수 있다.


묘한 건 그렇게 해방된 음악은 너무 흔한 음악이 되었고, 이제는 기아보다 비만이 걱정거리가 됐다. 쏟아지는 음악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달팽이관을 쳤고, 별이 되기 전에 먼지가 됐다. 흩어진 동료들은 그 먼지를 모아 자기만의 성을 짓다가 허물었고 나도 그러길 반복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았고, 좋았던 것 같은데, 그냥 그뿐이었다.



<6> 케이팝의 시대


서태지가 신곡을 내지 않은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어 간다. 이제 대한민국의 가요는 가장 세계화된 음악 중 하나가 됐다. 세계 최대의 음악 페스티벌 중 하나인 코첼라의 메인 무대에 블랙핑크가 섰고, 한국 가수의 세계 투어도 흔해졌다. 케이팝을 만드는데 유수의 외국 작곡가들이 덤벼들고, 세계적인 팝 가수들이 러브콜을 보낸다. 더 이상 글로벌스탠더드를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고, 가장자리의 음악도 실시간으로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러니까 서태지가 꿈꾸던 세계가 온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꿈을 이루다 보니 막상 서태지가 할 게 없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새롭게 등장하고 있지만 국내적으로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음악을 자신의 스타일로 구현하는 것이 그의 장기였다. 하지만 이제 세계 음악은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소비되고 있다. 좋은 음악은 계속 나오고 있지만, 미지의 공간이 사라졌기에 더는 신선하지 않다.


서태지의 신곡을 고대하며 기다렸던 시절은 지도의 공백이 많던 시대였다. ‘이번에는 또 어떤 듣도 보도 못한 사운드를 들려줄까?’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가 아니다. 아프리카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의 10대가 케이팝을 즐기는 세계시민이다.


Charli xcx의 『BRAT』은 훌륭한 음악이었고, 올해 가장 즐겨 들었던 음반이지만, 신선하진 않았다. Beyonce의 『Cowboy Carter』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Geordie Greep의 『The New Sound』도 그리 튀게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동안 너무 많은 음악을 흔하게 들어온 내가 노회해진 건지도 모른다.


서태지는 그럼에도 여전히 미지의 세계, 그 가장자리의 음악을 발굴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10년이 넘어 간다. 그 기다림에 지친 탓일까. 나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있다. 그 시절의 음악, 그 시절의 감성, 그 시절의 오글거림이 좋다. 꼭 새롭지 않아도 되고, 힙스터가 될 필요도 없다. 낡았지만 나의 뇌는 그때의 음표를 오늘도 띄운다. 서태지의 신곡이 전혀 힙하지 않아도 나는 좋을 것이다. 이제는 청춘을 회고하는 나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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