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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를 위한 장소의 질문

이우환공간

by citevoix



한 예술가의 고집과 한 도시의 요청이 맞닿은 순간, 그 조용한 시작은 곧 또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이우환공간의 서사는 그렇게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오시마에 이우환 미술관이 문을 연 직후, 부산시립미술관은 한국에도 작가의 이름을 건 공간을 세우고자 했고, 조일상 당시 관장은 일본에 있는 자택을 직접 찾았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돈 대답은 거절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건 미술관이라는 점과 행정 절차의 번거로움이 이유였다.


그로부터 2년 뒤, 다시 이뤄진 만남에서 이우환 작가는 "한국에 미술관이 세워진다면 부산이길 바란다."며 공간의 위치와 설계 방향이 담긴 드로잉을 건넸고 자신의 11점의 작품 또한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기증 작품은 23점으로 늘어났고 이우환공간은 작가의 철학과 부산의 열망이 맞닿으며 미술관 건립에 속도를 냈다. 그렇게 2014년 3월 착공되어 이듬해 2015년 4월 10일, 이곳은 이우환의 예술철학과 도시의 열망이 만나 '이우환 갤러리'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하지만 곧 작가의 요청에 따라 '공간'이라는 명칭으로 수정되었다. 전시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관계와 사유를 위한 장소, 그 본질을 담기 위해서다.




도시의 경계 위에 놓인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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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공간이 놓인 자리는 도시적으로 이질적인 곳이다. 뒤로는 광안대교를 잇는 고가도로가 지나고 앞에는 벡스코와 고층 오피스 건물, 시민공원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미술관을 짓기엔 어딘가 산만한 자리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이 공간은 도시와 예술 사이에서 관계 맺는 방식의 가능성을 품는다. 작가가 오랫동안 사유해 온 ‘관계항’이라는 개념은 이처럼 겹치는 경계에서 발현된다.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여백,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간극을. 지리학자 황진태는 이 공간을 도시적 관계항이라 부르며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이 건축이 의도적으로 자리했다고 본다.



건축으로 구현된 ‘사이’


부산시립미술관 부지 안, 한때 공중화장실이 있던 자리에 지어진 이우환 공간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다. 전체 면적은 1,200㎡ 남짓으로 큰 규모는 아니지만 공간이 전달하는 밀도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건물은 도시의 틈에 조용히 눌러앉아 감각의 속도를 낮추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공원을 가로질러 다다른 건물의 모습은 노출 콘크리트와 매끈한 유리 커튼월만으로 마감되어 있다. 무언가를 추가하거나 과시하기보다 덜어냄을 통해 장소의 의미를 새로 조율하는 건축적 접근이 돋보인다. 유리의 매끄러움과 콘크리트의 거침, 투명함과 불투명함의 대비는 자연과 도시, 외부와 내부, 물성과 비물성 사이의 긴장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이우환 작가는 이곳을 자신의 예술철학이 체화된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따라서 그 분위기를 온전히 경험하길 바라는 마음에 실내 촬영은 금지하고 있다.


좁은 입구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긴 복도가 시야를 끌어당기고 자연광이 커튼월 유리를 통해 천천히 스며든다. 내부는 인공조명을 최소화하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흐름을 통해 공간의 리듬을 형성한다. 정적이 채우는 공간에서 빛은 벽과 바닥, 천장을 따라 흐르며 관람객과 작품 사이의 관계를 조용히 매개한다.


일반적인 전시실은 다수의 작품과 명확한 동선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우환공간은 그 구성을 비껴간다. 전시실 사이의 여백은 넓고 각 공간에는 소수의 작품만이 배치된다. 이로 인해 관람객은 주어진 흐름을 따르기보다 스스로 머물고 멈추는 리듬을 갖게 된다. 이는 건축이 단지 작품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작품과 함께 감각을 구성하는 구조로 기능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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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어떻게 관계가 되는가


이러한 시도가 가능했던 건 공간 자체가 이우환의 예술 세계 '관계항'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작품뿐 아니라 변 여백, 빛, 재료의 질감까지도 하나의 구성 요소가 되어 긴장을 만들고 조화를 이룬다.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 앞마당에도 그의 대표 설치 연작인 <관계항> 일부가 배치되어 있다. 원형의 금속 조형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마주한 채 놓여 있고, 사물과 사물 사이의 거리, 시선, 긴장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이들은 실내 전시와 직접 연결되진 않지만 외부 공간에서 관계라는 개념을 미묘하게 확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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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 이우환 공간은 하나의 쉼표처럼 조용히 머문다. 무엇도 과시하지 않고 무엇도 확언하지 않은 채 그저 관계를 상상하도록 이끈다. 어쩌면 작가가 이곳에서 진짜 의도한 건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그곳에 서 있을 때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과 관계를 맺게 되는가를 질문하는 장소일지도 모른다.


글, 사진 | citevoix






- 운영시간

화-일 10: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 부산시립미술관 주차장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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