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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담는 벽돌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by citevoix



도시는 불편한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한다. 상처와 부끄러움 혹은 감당하기 어려운 과거는 도시의 표면에서 서서히 침묵으로 덮인다. 그러나 모든 기억이 그렇게 지워지지는 않는다. 어떤 장소들은 오히려 그 망각의 흐름에 저항하듯, 사라진 이야기를 다시 드러내 보인다. 서울의 오래된 한 자락, 이름보다 공백이 더 많았던 땅 위에 세워진 한 공간이 있다. 햇빛이 닿지 않는 낮은 입구 하나가 조용히 열려 있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길은 도시가 어떻게 고통을 감각하고 어떻게 기억할지를 건축적으로 묻는다. 지워졌던 자리 위에 다시 쓰인 이 공간은 단지 전시의 장소가 아니라 기억의 감각을 구성하는 사회적 실험장이기도 하다.




폭력의 기억과 도시의 침묵


서소문 일대는 과거 조선시대 한양의 서쪽 출입문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기억 속의 서소문은 '문 안'이 아니라 '문 밖'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가 집중되며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서소문 밖 형장'이라는 명칭으로 한국 종교사와 인권사에서 상징적 장소가 된다. 당시 이곳은 도시 외곽이자, 국가 권력이 폭력을 가시화하던 경계의 장소였다. 사법기관과 가까운 행정적 조건과 한강 지류의 만초천의 접근성은 이곳을 물리적 처형 공간으로 기능하게 했다. 19세기 내내 수많은 신자들이 이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금은 이곳이 가장 많은 성인과 복자를 배출한 순교의 성지로 기록되지만 그 시작은 국가의 폭력과 사회적 배제의 공간이었다.



근현대에 들어오며 도시의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철도와 도로가 깔리며 서소문을 철거한다. 1990년대에는 중구의 재활용 쓰레기 처리장과 공영주차장으로 쓰이며 도시의 음지로 전락하며 순교자들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만 갔다. 그러던 2000년대 이후,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서울시의 협력 아래 지하에는 기억을 품은 복합문화공간과 지상에서는 고요한 공원이 놓이며 이곳에 묻힌 이야기를 드러내는 장소가 생겨났다. 바로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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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위로 솟은 건물도, 눈에 띄는 구조물도 없다. 지상은 온전히 공원으로 내어주었고 그 중앙에는 의도적으로 빈광장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건축이 아닌 땅의 틈, 광장 바닥에 마련된 낮은 입구다. 그 입구로 향하는 길은 계단 없이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며 어느새 방문객은 깊이 침잠하는 듯한 감각에 휩싸인다. 아마도 기억은 천천히 내려가며 새겨야 한다는 건축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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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마주하는 광장은 몸을 숙이고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구조다. 이는 도시의 기억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니라 함께 걷고 함께 감각하는 방식으로 맞이하겠다는 건축적 선언처럼 읽힌다. 서소문이라는 장소가 기억을 보는 곳이 아니라 직접 걸어 들어가는 곳이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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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위로, 콘솔레이현 홀


우리는 위로와 위안을 꼭 밝은 곳에서만 찾지 않는다. 때로는 눈을 감고 고요에 기대듯, 어두운 공간에서 비로소 마음을 가라앉힌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지하 깊숙한 곳에 자리한 콘솔레이션 홀은 바로 그러한 감각을 담아낸 공간이다. 죽음을 기리는 장소가 왜 어둡고 낮고 무거워야 하는지를 묻기보다 그 어둠 안에서 우리가 어떤 감정을 받아들이고 돌아보게 되는지를 천천히 되짚게 만든다.


순교자의 길을 따라 고통의 흔적을 지나 흘러 들어오는 이곳은 별다른 문이나 경계 없이 홀의 입구가 열린 듯 닫혀 있다. 콘솔레이션 홀은 기둥 하나 없이 띄워진 거대한 철판 구조물로 둘러싸여 있다. 철판 하나하나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단단하게 이어져 빛을 흡수하는 듯한 중량감으로 공간을 감싼다. 바깥과 완전히 차단된 이곳은 시간도 소소리도 잠시 멈춘다.



콘솔레이션 홀은 단순히 박해를 기억하는 상징적 공간을 넘어서 도시가 죽음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을까를 묻는 공간이기도 하다. 도시사회학자 피에르 노라(Pierre Nora)가 말한 바와 같이 기억은 언제나 공간에 기입되며 그 장소는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매개한다. 콘솔레이션 홀은 추모와 명상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도시 속에서 망각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물리적 저항의 구조이기도 하다. 바닥에 닿는 빛은 적고 벽면은 온전히 침묵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에는 박해 시기에 순교한 다섯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있지만 장식도 해설도 없이 공간 그 자체로 감정을 전달한다. 이는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라 '감각하게 하는 공간'이다. 누군가는 여기서 오래 머물고 누군가는 조용히 지나간다. 그 각각의 몸의 움직임이 이 공간에 '기억의 몸짓'을 더한다.


어둠 속 위로라는 개념은 단순한 건축의 분위기가 아니라 도시가 상처를 어떻게 감각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이는 개인의 치유뿐 아니라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방식은 말보다는 공간의 구조, 빛보다 그림자의 농도로 이뤄져 있다. 콘솔레이션 홀은 그런 점에서 이 도시가 여전히 감당 중인 죽음의 무게를, 가장 조용하고 밀도 높게 품고 있는 장소다.




기억을 밀어 올리는 하늘광장


가장 깊고 내밀했던 콘솔레이션 홀을 지나면 마치 그 감정을 밀어 올리듯 완전히 반대 성질의 공간이 맞이한다. 바로 하늘 광장이다. 지하 깊숙한 길을 걸어온 관람자는 낮고 어두운 천장을 통과한 후, 무려 18미터 높이로 솟은 벽돌 구조의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이곳은 닫힌 사방과 열린 위를 동시에 품고 있는 공간,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기념비이자 감각의 변곡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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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광장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 가장 강력한 공간감을 주는 장소다. 사방 벽과 바닥을 채운 붉은 점토 벽돌은 이 공간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품고 있는지를 말없이 설득한다. 벽돌은 결코 단번에 지을 수 없다. 하나하나 손으로 쌓아 올린 그 공정은 시간의 켜가 쌓여가는 과정 그 자체다. 이는 이 장소가 가진 고통과 기억의 역사성 그리고 그 역사 위에 천천히 올려진 사유의 흔적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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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게 쌓인 벽은 그 자체로 위압적이지만 바로 그 벽 위에 열려 있는 사각의 하늘은 오히려 시원하게 열린 감각을 준다. 이 대비는 명확한 메시지를 건넨다. 기억은 억눌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폐쇄의 공간조차도 해방의 가능성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도시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이 말한 ‘열린 도시’의 조건처럼 이곳은 닫힌 구조 속에서도 열린 시선을 허락하는 방식으로 공공의 감각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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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광장은 정적인 명상의 공간이자 동적인 문화행사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붉은 벽돌 사이를 산책하는 사람, 하늘을 올려다보며 침묵에 잠긴 사람, 혹은 공연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 이 공간은 기억을 조용히 혼자 되새기는 곳이자 함께 나누며 미래로 확장하는 공동체적 장소가 된다. 이곳에 설치된 예술작품 ‘서 있는 사람들’은 그런 공동체의 상징이기도 하다. 과거 기차가 달렸던 침목이 하늘을 향해 다시 서 있는 이 형상은 짓밟히던 시간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으려 했던 이들의 서사를 은유한다. 어둠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하늘광장에서는 조용히 또렷하게 다시 선다.



기억을 감당하는 도시


도시가 기억을 감당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죽음과 상처의 서사를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감각하고 마주하게 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어두운 콘솔레이션 홀에서부터 빛이 쏟아지는 광장까지의 동선은 기억의 무게와 그것을 통과해 나아가는 감정의 리듬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도시의 시간이 단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다시 걷는 일이다. 그리고 그 걷는 몸들이 기억의 장소를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서소문이라는 땅은 이제 도시가 감당해야 할 과거이자, 함께 감각해야 할 미래로 열려 있다.


글, 사진 | citevoix






- 운영시간

화-일 09:30-17:30(매주 월요일 휴관)


- 내부 주차장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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