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금벚꽃문화길
부산 백병원으로 향하는 길, 가파른 언덕을 만났다. 부산에서는 흔한 산복도로의 풍경이었다. 지도에서 표시되지 않고, 특별할 것 없는 동네의 골목길이었으니까.
하지만 매년 봄, 3월 말에서 4월 초 사이 이 길은 봄을 느끼려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벚나무에 분홍빛이 물드고, 그 아래 계절의 기억을 남기려는 발걸음이 이어진다. 개금동의 가파른 언덕길, 벚꽃 가지가 골목 아래까지 드리운 곳. 사람들은 이곳을 '개금벚꽃문화길'이라 부른다.
언덕길은 개금골목시장을 지나 상가주택이 어깨를 맞댄 넓은 골목을 따라 이어진다. 1970년대, 몇몇 부식가게가 모여 자연스레 형성된 시장은 1975년 정식 개장을 거쳐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개금동은 일제강점기 이후 이주 노동자, 전쟁 피란민, 경제개발기 이주민 등이 모여 형성된 산복도로 주거지다.
시장 골목을 지나 엄광산 자락을 따라 켜켜이 들어선 주택들, 가파르게 기운 계단, 창문 하나 사이로 옆집과 눈이 마주칠 듯 가까운 풍경은 이곳의 일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언덕 꼭대기에 가까워질 즈음,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 발자국이 새겨진 골목 위로 보이는 지형적 제약, 난개발의 흔적, 낙후된 주거환경은 단순한 물리적 구조를 넘어, 부산만의 삶의 역사를 보여준다.
다시 몇 분을 올라가니, 이내 사람들이 '개금벚꽃문화길'이라 부르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길이 180m 남짓한 이 길은 언덕과 주택 사이 남은 틈새 공간을 따라 조성됐다. 이 벚꽃길은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일환으로 탄생했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의 역사성과 공동체성, 공간의 특성을 보존하며 도시 재생과 문화 기반 회복을 목표로 한다. 언덕길을 따라 길이 127m, 폭 약 1.5m 구간에 보행 데크가 설치되었고, 벤치와 평상도 함께 마련됐다. 단순한 이동로가 아닌, 주민들이 쉬어갈 수 있는 쉼터이자 동네 커뮤니티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갖춘 것이다. 또, 데크 위로는 벚꽃나무가 심어졌고, 다양한 수목을 더해 동네의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러던 어느 해 봄, 누군가 이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리면서 입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던 이곳을 찾아 나섰고, 개금벚꽃문화길은 '벚꽃 명소'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예쁘고 걷기 좋은 길이라는 이유만으로 명소가 되진 않는다. 사회적 약자가 모여 살던 공간을 살기 좋은 마을로 바꾸려는 도시 재생 노력과 지역 주민의 문화 복원이 맞물린 결과였다. 이 길이 진정한 공공 공간으로 기능하려면, 사람들이 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관광 명소로 자리 잡은 이후, 이곳이 지역민의 삶과 도시의 자산에 더 밀착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이 길도 재개발의 손길을 피하진 못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개금동 일대는 재건축과 정비 사업이 꾸준히 논의되고 있다. 일부는 뉴빌리지 사업지로 지정되어 노후 주거지를 개선하려는 계획이 수립 중이다.
벚꽃 가지 아래 켜켜이 쌓인 저층 주택의 지붕은 머지않아 고층 아파트의 스카이라인으로 바뀌겠지. 새로운 도로와 편의시설이 들어서고 도시는 기능적으로 진화할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안전하고 쾌적한 도시의 삶이라는 명분 앞에서 쉽게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이 180m 남짓한 길은 여전히 오래된 마을의 일상과 공동체, 그리고 이 동네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주민들이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아이들이 등하굣길에 뛰어노는 공간. 그리고 봄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이 사진으로 봄날을 기록하는 장소로.
벚꽃은 내년에도 분명 다시 피고 질 것이다. 계절은 놀라울 만큼 성실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도시의 물리적 조건은 그렇지 않다. 한 번 철거된 건물과 언덕은 다시 되살리기 어렵다.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더라도 이 공간이 사라지지 않도록, 공공성과 커뮤니티의 기능을 유지할 방법은 없을까. 기존 언덕길이 제공하던 보행의 경험, 틈새 공간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쉼터, 이웃 간의 느슨한 연결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결국 도시의 재구성이란, 새로운 변화 속에서 기존의 기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글, 사진 | citevoix
내용 참고 | 부산역사문화대전, 부산광역시 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