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와 정주의 경계에서
남해 독일마을
한적한 남해 바닷가에 붉은 기와지붕이 언덕을 따라 늘어서 있고 창문마다 알록달록한 꽃이 걸려 있다. 멀리서 보기만 했을 뿐인데 유럽의 어느 작은 마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국적인 풍경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수제 맥주와 소시지를 판매하는 상점부터 카페까지 한글 간판이 곳곳에 보인다. 독일 교포들이 정착한 마을이지만 지금 이곳에는 정착민보다는 관광객이 훨씬 익숙한 풍경이 되어 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와 상점, 활기를 띠는 축제 현장을 보고 있으면 관광 활성화의 긍정적인 효과가 느껴진다. 하지만 마을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관광지와 정주 공간 사이에서 균형을 잃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한때 고향을 꿈꾸며 정착한 이들은 여전히 이곳을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관광형 도시재생의 명암
남해 독일마을은 1960~70년대 독일로 떠난 광부와 간호사들이 귀국 후 정착할 수 있도록 조성된 곳이다. 독일에서 평생을 타지인으로 살아온 이들에게 이곳은 ‘한국 속 작은 독일’이자 노년을 보낼 터전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마을의 성격은 점차 변해갔다. 한국에서 흔치 않은 독일풍 건축물이 입소문을 타면서 관광객이 몰려들었고 남해군은 이를 지역 활성화의 기회로 삼아 관광형 도시재생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마을 곳곳에는 독일식 맥줏집과 카페가 들어섰고 매년 열리는 맥주 축제(Oktoberfest)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며 자연스럽게 마을 외곽에도 숙박업소와 상점이 늘어나며 지역 경제에도 활력이 생겼다. 뿐만 아니라 마을 내에서는 독일마을 행복공동체 영농조합을 중심으로 독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운영되었고 민박업 역시 마을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관광지로서의 성공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독일마을의 본래 기능, 즉 ‘정주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은 점차 희미해졌다. 처음에는 독일 교포들이 직접 운영하던 가게들이 점차 외부 자본에 의해 하나둘씩 넘어갔다. 곧 지역 주민보다 외지 사업자들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게 되었고 결국 일부 독일 교포들은 “이제 우리가 있을 곳은 없다”며 마을을 떠나는 상황에 놓였다. 이곳은 관광형 도시재생이 정착민을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관광객을 위한 것이었을까?
관광과 정주의 균형을 찾는다는 것
이는 남해 독일마을만의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다. 부산 감천문화마을, 여수 천사벽화마을 등 관광형 도시재생이 이루어진 곳들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여행자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벽화를 그리고 상점을 만들고 축제를 열었지만 그 과정에서 정작 그곳에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은 점점 사라져 갔다. 하지만 모든 관광지가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여러 소도시를 대상으로 추진한 ‘리틀 교토’ 프로젝트는 지역 주민과 관광을 연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단순히 교토풍의 건축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가게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나갔다. 그 결과 관광객과 주민이 함께 어우러지는 지속 가능한 형태의 관광지가 조성되었다. 그렇다면 남해 독일마을이 다시 정주의 기능을 회복하면서도 매력적인 여행지로 남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첫 번째로 관광과 정주가 균형을 이루는 방법을 고민하며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현재 독일마을은 이를 위해 마을 전체를 ‘네트워크 호텔’로 개편하는 방식을 도입했으며 이를 통해 ‘남해독일마을호텔’이라는 이름으로 운영 방식을 통합했다. 기존의 민박집들은 독립적으로 운영하되 공용 용품을 통일해 방문객들에게 보다 체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그 목표다. 그러나 국내 최대 유럽형 마을호텔이라는 콘셉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해외여행 경험이 늘어나며 눈높이가 높아진 국내 관광객들에게 어떤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할 수 있을까?
두 번째, 단순히 독일풍 건축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남해라는 지역적 특성을 마을의 정체성에 녹여내는 시도도 필요하다. 현재 독일마을은 독일적인 요소에 집중하고 있지만 남해의 자연과 문화를 결합한다면 보다 독창적인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다. 건축적 요소뿐만 아니라 지역 고유의 음식, 예술, 생활방식과 독일 문화를 융합하는 방식으로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관광지로서의 성공만을 목표로 삼아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마을이 살아있는 공간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계속 머물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정주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독일 교포들의 거주를 지원하는 정책을 마련하고 새로운 정착민이 유입될 수 있는 대안 역시 고민해야 한다. 관광객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공간이 아닌 실제로 삶이 지속되는 마을이 될 수 있게끔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와 동시에 관광의 형태도 변화해야 한다. 방문객들이 단순히 사진을 찍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체류형 여행으로 전환해야 하는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독일 교포들과 함께하는 홈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독일과 남해의 문화를 결합한 체험형 워크숍을 마련한다면 여행자들에게 더 깊은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기회가 될 수 있다.
바다내음이 가득한 바닷바람이 부는 독일마을의 언덕에 앉아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붉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집들 안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곳. 관광이 지역을 변화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변화가 반드시 ‘재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광산업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정작 지역민이 설 자리를 잃는다면 그것이 정말 ‘도시재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남해 독일마을은 이제 새로운 질문 앞에 서 있다.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다시금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는 공간으로 남을 수 있을까? 여행자와 정주민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일까? 이제는 그 답을 찾아야 할 시간이다.
글, 사진 | citevoix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