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플루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하여 악의 문제라는 논제를 제시하였다. 악의 문제란,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악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현재 실재하는 악을 보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추해 내는 방식의 논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증은 과연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인가?
먼저 악의 문제는 유일신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논제라는 점에서 허점이 있다. 유일신교의 관점을 벗어나 다신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악과 고난의 존재는 선한 신과 대칭되는 악한 신을 통해 설명되는 것이기에 악의 존재 또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된다.
만일 우리가 신의 존재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어떠한 것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신이 단일의 존재인지, 복수의 존재인지 또한 알 수 없다는 것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그것을 부정하고서 유일신적인 관점에서 신의 존재를 논증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에 불과한 것이다.
또 만에 하나 유일신이 진실이고, 그런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논증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규정한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사회와 생물적 자기 보전 본능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자연법이라는 게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관찰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인지를 초월한 것들에 대해서 선악을 판단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만일 모든 것을 동시에 관찰하고, 판단하는 절대자가 있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선과 악이 전능자에게도 동일한 가치를 지닐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마치 미시적 관점에서의 물리 법칙과, 거시적 관점에서의 물리 법칙이 다르게 나타나는 양자역학의 신비처럼, 절대자의 시각에서는 우리가 선으로 생각하던 것이 선이 아닐 수도,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악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선과 악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우리는 악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는 신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악의 문제라는 것은 결국 기독교적(혹은 이슬람적, 유대교적) 신을 부정하는 데에
만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부정하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할 수 없다.
실재하는 신이 선악에 관심이 없는,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 관조자라면 우리가 그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 우주의 물리법칙이 허용하는 이상의 것을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도 없다. 만일 신이 '자연'이라는 총체라면, 그것은 존재하면서도 관찰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택할 만한 선택지는 불가지론이다. 즉, 신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우리의 현세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으며, 인간에게 관심이 없는 신이 구태여 인간을 위한 내세를 구태여 만들 이유도 없는 것이니 우리의 죽음 이후에는 공허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만일 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것이 종교적 믿음을 가지지 않은 것보다 이익이라고 한다면, 단순히 관조자로서 우리에게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는 증명될 수 없는 존재를 믿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무엇일까? 이러한 존재를 믿는 종교가 인간들에게 어떠한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대개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사람들에게 종교적 교훈을 주고자 할 때 신의 뜻을 이야기하며 신이 인간 세계에 개입했던 흔적을 보이곤 한다. 즉,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존재를 파악했다는 것이며, 신이 인간세상에 개입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신이 존재한들 인간세상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를 믿을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 관조적인 신은 증명될 수도, 그리고 우리의 삶에 개입하지도 않지만, 그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한다고 믿음으로써 그의 존재로부터 만물이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고, 그 비롯됨은 어떠한 의지가 반영되었을 것으로 여기기 마련이기에 그 법칙을 파악하는 것을 곧 신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라 여기게 된다. 따라서 신이 개입하지 않는다 한들 우주의 법칙으로부터 그의 의지를 유추할 수 있게 된다. 즉,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는 것이 신의 의지를 파악하는 것이 됨으로써 과학이 곧 신학이 되는 것이다. 가장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종교의 영역을 가장 합리적이라 여겨지는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오며, 소모적인 도덕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