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민 케인 May 01. 2021

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법은 집단을 구성하는 강제력이다. 강제력이 없다면 법이 아니다. 법이란 구성원을 제약하는 힘으로, 집단의 이탈자를 제재하여 사회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를 통해 사회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안정성을 창출한다. 따라서 법은 곧 처벌을 내포한다. 처벌이 없다면 그것은 법이 아니다. 처벌이 없는 강제력이란 총알 없는 총과 같기 때문이다. 처벌을 회피하고자 하는 강한 두려움이 법을 지키도록 하는 동기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처벌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처벌과 죄의 동등성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완전하게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며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면이 강한 동물이기에, 처벌을 고려하기 이전에 감정적이고 충동적으로 법을 어길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가치가 변화하는 만큼 이전에는 죄가 되었던 것이 이제는 죄가 아닐 수 있고, 그에 따라 처벌을 받았던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을 여지가 존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완전히 이성적이고 법 또한 무결하다면 모든 처벌을 사형으로 할 때 범죄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기에, 법은 언제나 죄의 무게를 측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죄의 무게를 측정함에 있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피해자의 감정이다. 이것은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인데, 피해자의 감정이라는 요소가 근대에 도입된 인권이라는 개념에 밀려 주목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에서 피해자의 감정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피해자가 만족할 만큼의 처벌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에서 처벌을 회피하고자 하는 강한 두려움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믿음이 깨진다면 법은 범죄를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없게 된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태동하던 시기는 전제정권에서 법에 의한 지배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그 시기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법은 가해자를 위한 것이었고, 인권은 피해자를 위한 것이었다. 법에 의해 재판을 받는 이들은 국가에 의해 탄압을 받는 자들이었고, 따라서 범죄자를 위한 인권은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언제나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앞서 말했듯, 인권의 취지를 생각해볼 때 원고가 국가이고, 피고가 국민일 경우 재판에서의 피고의 인권은 보호받아야 할 정당성이 있다. 그러나 민간인 사이의 재판일 경우에까지 이러한 인권이 정당화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특정인이 우월한 권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는 게 명백한 상황에서까지 범죄자의 인권이 피해자의 감정에 우선해야 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죄의 무게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범죄자가 피해자에게 끼친 피해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사실로 확인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피해자에게 감정적인 피해를 입혔을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대체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최소한 피해자가 입은 피해만큼의 손실을 가해자가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만 지켜지더라도 법에 대한 신뢰는 매우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추가적인 페널티를 얼마나 더하여야 범죄를 가장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여 처벌을 강화하여야 한다. 


혹자는 처벌은 복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화를 위해 존재하여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이야기이다. 처벌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 전체의 교화를 위한 것이어야 하지 범죄자 개개인의 교화를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범죄자 개개인의 교화를 기대하며 피해자의 감정을 무시한다면, 전체적으로 법에 대한 신뢰가 깨지며 법이 범죄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조장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 명백하다.

작가의 이전글 거짓된 희망은 더욱 고통스럽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