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은 존재의 이상이다. 영원하다는 것은 곧 완전함, 완벽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직 황금의 균형에 도달한 존재만이 영원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리고 영원성을 손에 넣음으로써 그 존재는 자연의 질서의 한 일부가 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연의 법칙이란 태초의 순간에 정해진 것이며, 자연의 규칙이 정해진 이후에 그것을 바꾸는 것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란 어찌 되었건 영원불변한 자연법칙이 될 수 없는, 한정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기에 현실과 이상의 모순에 고통받는다.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생명은 번식이라는 행위로 자신의 존재를 연장하고, 불변하는 자연법칙의 일부가 되고자 몸부림친다.
인간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원에 대한 인간의 탐닉은 생명으로서 당연한 욕망이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고,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충동은 생명이 존재하도록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이러한 욕망은 물질적인 세계를 넘어 정신의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인간은 자신의 필멸성을 극복하기 위해 정신적으로도 번식하는 생물이다.
정신의 번식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인간의 정신은 언어라는 기반에서 생성된다. 현상과 사물을 고유한 방식으로 특정하는 도구가 언어이다.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인간은 정신이라는 세계를 구축한다. 이렇게 구축된 세계는 소통이라는 과정을 통해 타인에게로 전달되며. 복제되고 확장된다. 이것이 정신의 번식이다.
인간은 정신의 번식을 터득하며 불멸성이라는 환상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생물적 번식을 하는 것보다 더욱 빠르고 간단하고 더 오래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퍼뜨릴 수 있게 되었기에, 인간은 단순한 생존과 번식 이상의 수단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부와 명예, 그리고 신앙이다.
신앙은 인간이 죽음의 필연성을 깨닫고, 이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절망하며 만들어낸 것이 사후세계라는 개념인데, 인간은 현세에서의 필멸성을 인정하고 내세에서의 불멸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영원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였다.
부는 인간에게 생존 이상의 가치가 생겨나고, 그 잉여가치를 저장하는 데에 물질 이상의 수단을 사용하기 시작하며 발생하였다. 인간의 부가 다람쥐의 도토리와 다른 점은, 인간의 부란 실체가 없이도 타인의 인정(認定)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타인의 인정이라는 사회적 자본이 유지된다면 부는 부패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적 자본의 대표적인 예가 명예이다. 명예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타인의 기억 속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데에서 발생한 것인데, 이러한 욕망이 극단적으로 치닫는다면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만든 자는 타인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끝없이 재생산하며 정신적인 불멸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불멸이란 형이상학적인 목표는 인간을 자연의 법칙에서 유리시켰고, 결국 우리를 발전시키는 힘이 되었다. 불멸에 대한 욕망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정해진 법칙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전 느낄 수조차 없는 사후세계를 위해 현생을 희생하게 하였고, 평생 사용하지도 못할 부를 축적하게 하였고, 하잘것없는 이름 한 줄을 남기기 위해 평생을 내동댕이 치도록 하였다. 영원에 대한 환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이다.
이런 인간다움은 인간을 발전시키기도, 인간을 타락시키기도 한다. 인간은 이런 환상을 좇아 자신의 한계조차 기꺼이 도전할 수 있기에 다른 생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극단적으로 사악한 일조차 이런 환상이 존재하기에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만 사는 사람이 하는 일은 결코 영원을 꿈꾸는 사람이 하는 일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