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축구팬
나는 프리미어리그 리버풀 FC의 팬이다. 새벽 경기까지 챙겨보지는 못하지만 자정 전에 시작하는 그 동네 낮경기는 최대한 생방으로 챙겨보려하고, 볼 수 없는 시간대의 경기는 다음날 하이라이트를 꼭 챙겨본다.
주요 선수들의 등번호와 포지션은 다 외웠고 A매치 기간에는 팀내 선수들의 국가대표 활약에 관심이 간다. 두루두루 모든 선수들을 다 좋아하지만 그 중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레프트백 앤드류 로버트슨이다. 그러나 클럽 자체를 응원하는거지 특정 선수의 팬이 되어본적은 없었다.
지난 초여름 월드컵때는 우리나라 경기는 물론이고 남의 나라들 경기까지 거의 챙겨봤다. 우리나라 국대 경기는 스웨덴전, 멕시코전까지는 너무 답답했지만 독일전은 드라마 같았다. 그러나 하나의 대회 전체가 드라마였던건 가장 더울 때 진행됐던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 게임이었다.
#2 난세의 영웅
축구를 좋아하니까 바레인전부터 시작된 일곱 개의 경기를 다 봤다. 처음 이 대회에 큰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손흥민 선수의 군면제 때문이었다. ‘우리 흥민이 군대 가면 안되는데’ 하며 손에 땀을 쥐고 봤던 것이다. 두 번째 경기였던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지는 바람에 ‘흥민선수 군대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지기도 했지만 다음 경기를 꾸역꾸역 이겨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진짜로 모두가 군대에 갈뻔한 경기는 8강전이었다. 그날 경기는 퇴근 시간쯤에 시작되어 사무실에서 문자 중계를 켜놨었는데, 이미 대회 시작하고 4골을 넣었던 황의조 선수가 시작한지 4분만에 선제골을 넣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회사 선배한테 “선배님, 우리 벌써 1골 넣었어요. 또 황의조가 넣었대요.” 라고 말한 뒤 짐을 싸서 퇴근했다.
아프리카 티비로 중계를 보며 퇴근했다. 지하철이었다. 이미 실점을 해 동점이었다. 불길한데다가 통신상태가 안좋아 중계를 보기 어려웠다. 이미 집에서 경기를 보고 계신 엄마가 카톡으로 중계를 해주셨다. 황의조 선수가 골을 하나 추가해 다시 한점 차이로 앞서갔다. ‘아, 그럼 이기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탄 후, 불운한 소식이 전해졌는데 연이은 수비 실책으로 두 골을 실점해버린 것이다. 먼길을 돌아 집에 도착했을 때 스코어는 2:3이었다. 우리가 지고 있었다. 세계적인 선수가 상주 상무도 아닌 동사무소에서 도장을 찍게 생겼다. 벌써 후반전이 절반이나 지나갔는데 말이다. 축구보는걸 좋아하지만 차마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논산이 목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 인생과는 직접적인 상관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골방에 들어가 선수들의 군면제를 위해 기도했다. 엄마 혼자 거실에서 티비를 보셨다. 그런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나가봤더니 동점이 되었다고 했다. 티비에서 득점 장면을 다시 보여줬다. 놀랍게도 이미 두 골을 넣었던 황선수가 해트트릭을 했다. 코앞에 다가왔던 입대는 일단 뒤로 미뤄졌고 연장전이 시작됐다.
아까운 찬스들이 수차례 지나갔다. 마지막 연장전 후반도 절반이 지나갈 때쯤이었다. 황의조 선수가 상대 골문에서 넘어지며 패널티 킥을 만들었다. 그 PK를 성공함으로써 우리나라는 혈투 끝에 준결승에 힘겹게 진출했다. 황의조 선수는 그 경기에서 난세의 영웅이었다.
결국 대표팀은 금메달을 따내며 세계적인 축구스타는 동사무소에서 일하지 않게 되었다. 만약 그날의 해트트릭이 없었더라면 8강에서 탈락하고, 뛰어난 실력을 가진 스트라이커도 잃을 뻔했다.
병역특례를 얻은 황의조 선수는 기량이 더욱 상승했다. 두 번째 A매치 골을 넣는데는 3년이 걸렸지만, 세 번째, 네 번째를 넣는데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가 공을 잡으면 답답한 적이 없다. 문전에서 공을 터치하면 항상 재미있는 플레이를 보여주기 때문에 경기를 보는 것이 기대가 된다. 그래서 황의조 선수의 경기를 직접 가서 보기도 했다.
#3 사이타마, 그리고 스이타에서
직관의 장점은 포기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일단 갔으니 끝까지 보게 된다는 거다. 아시안게임 8강때처럼, 나는 지고 있는 경기를 끝까지 보지 못한다. 선수들은 끝까지 버티는데, 관중인 나는 끝까지 버티지 못한다.
그러나 경기장에 가면 어쨌든 끝날 때까지 앉아 있어야 한다. 물론 적지 않은 입장료의 영향이 있겠지만, 끝까지 버티는 힘은 다른 곳에서 온다.
옆에 있는 수많은 축구팬들의 에너지 때문에 지레짐작하여 포기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이기고 있다가 실점하여 비기는 상황일 때도 평소보다는 덜 낙심하게 된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보면 추가골이 나왔고 결국 이겼다.
정말 감사하게도 내가 직관한 황의조 선수의 세 경기는 모두 승리로 끝났다. 황선수는 홈경기, 원정경기를 가리지 않고 모두 골을 넣었다.
최근 마지막 경기는 엄마를 모시고 간, 홈에서의 쇼난 벨마레전이었다. 황선수는 아시안게임 이후 한 경기도 쉬지 않고 리그에서 골을 넣어, 구단은 8연승을 하며 강등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는 감바 오사카의 에이스였고, 팬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았다.
유니폼 가판대에는 황의조 선수의 백넘버가 걸려 있었지만 실제로는 매진이었고,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구단 팬들이 뽑는 베스트 플레이어로 선정되어 상을 받았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지난 사이타마에서도 목격했던 고질적인 백패스와 불안한 수비로, 상대에게 끌려가는 경기가 전반전 내내 지속되었다. 황선수가 있는 최전방까지 공은 거의 가지 않았다. 엄마는 이러다가 0:0으로 끝나는거 아니냐고 하셨다.
이번엔 엄마도 함께였기 때문에 골도 나오고, 승리도 하면 좋겠다 생각했다. 직관간 사람에게 0:0의 경기가 제일 낭패이니 말이다. 특히 이날 경기는 엄마의 첫 축구경기 직관이었다.
후반전이 시작되고 팀의 전체적인 경기력은 나아졌다. 그리고 14번 선수가 오른쪽 끝에서 완벽한 크로스를 줬고, 쇄도하던 황의조 선수는 찬스를 놓치지 않고 다이빙하며 헤더로 골을 만들었다.
황의조 선수의 그 한 골이 유일했다. 그날의 승리로 감바 오사카는 1부 리그 잔류를 확정지었다. 경기가 끝난 이후, 체력관리를 위해 교체로 나갔던 황선수는 다시 필드로 들어와 경기장을 돌며 팬들에게 인사했고, 그들은 선수에게 응원가를 불렀다.
그날 들은 응원가만 대여섯 번 이상이었던 것 같다. 팬들에게 정말 사랑받고 있었다. 나라도 한 경기당 한 골씩 넣어주는 선수를 안 예뻐할 수 없을 것이다.
와일드 카드 논란부터 시작된 한 선수의 최근 3개월은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만큼이나 하나의 드라마 같았다. 절치부심하여 단점을 개선하고 장점을 갈고 닦은 세월들이 모여, 정통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잇는다며 칭찬받는 오늘날의 황의조 선수를 만든 것 같다.
훈련시간보다 일찍 나와 슈팅 연습을 한다던가, 쉬는 날에도 케인이나 벤제마 선수의 플레이를 보며 연구한다는 그의 인터뷰 때문에 거의 10년 전에 본 책 한권이 떠올랐다. 말콤 글레드웰의 <아웃라이어>다. 책에 등장한 잡다한 사례들은 잊어버렸지만 ‘일만 시간의 법칙’이란 키워드는 잊지 않았다.
다시 태어나도 축구를 하겠다는 열정과 일만 시간을 채울듯한 노력의 결실이 멋지다. 덕분에 앞으로 어떤 일에 열정을 가져야하며 또 그 일에 어떻게 시간을 쏟아야할지, 내 인생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