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st Day / 2019년 4월의 오사카
여행이다. 휴가가 시작됐다!
새벽 4시 20분에 일어났지만 생각보다 피곤하지 않았다. 아무리 반복되더라도 난 여행이 절대 지겹지 않다. 물론 전날 짐을 싸는 건 지겹고 따분하긴 하다. 누가 대신 싸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그러나 이젠 이런 단거리 여행 짐을 싸는 건, 마치 회사 합숙교육을 준비하는 것처럼 부담이 없다. 특히 비행시간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일본 간사이 공항행이라 마음이 가볍다.
작년 늦가을, 장거리 여행인 암스테르담 여행을 포기하며 일본 여행 두 번과 맞바꾸었다. 괜찮은 전시가 많이 열렸고, 응원하는 선수가 J리그에서 뛰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일본을 왕래했다. 시간도, 경비도 유럽여행보다는 덜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회사에 휴가를 하루만 낼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휴가를 하루만 사용하기 때문에 굳이 회사에 내가 어디 가는지 얘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번에도 내가 오사카에 간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여행 사실을 알리지 않을 경우, 가장 큰 문제점은 내가 한국의 집에서 쉬는 줄 아는 회사 사람들이 자꾸 회사일로 연락을 한다는 것이다. 불과 한 달 전에도 그랬다. 심지어 나중엔 내가 해외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으면서도 당장 본인 일을 해결해달라고 떼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어차피 내가 한국에 없다는 걸 회사 사람들이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므로, 여행 간 걸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공항에 도착해 휴대폰을 켜자마자 업무를 묻는 메시지가 와있었다. 나는 최대한 제한된 문자 언어로 내용을 전달하고자 애썼지만, 상대는 그걸 참지 못하고 전화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걸었다. 해외에선 전화를 받아도 요금을 내야 하지만, 그래도 여행 간 걸 들키기보다는 전화받고 요금을 내는 게 낫다. 다행히 첫 번째 업무연락은 긴 시간이 걸리지 않고 잘 해결되었다.
오사카 시내에 도착한 후부터 무언가 조금씩 잘못되기 시작됐다. 처음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미슐랭에 이름이 올라 줄 서서 먹어야 한다는 소바 가게인 ‘나니와 오카나’에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시간대를 잘 맞춰 갔는지 대기 시간 없이 바로 소바를 먹을 수 있었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러 갔던 기타하마에서도, 평소에는 30분은 기본이고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인기 카페 ‘모토 커피’에서도 들어가자마자 발코니 자리를 배정받았다.
주문한 아이스커피와 티라미수가 나왔다. 강바람 때문인지 테라스에 바람이 많이 불어서 감기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이스커피는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무난할 줄 알고 시켰던 티라미수에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술맛이 났다. 케이크에 술이 들어간 걸까, 아까 소바집에서 일본주를 마셨기 때문인 걸까 갸우뚱하고 있을 참에 또 회사에서 두 번째 전화가 왔다.
이번엔 다른 부서 사람이었다. 사실 통화도 처음 해보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밖에 계신데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ㅇㅇ 업체에 대한 건 누구에게 물어보면 될까요?”
갑자기 짜증이 났다. 대체 나의 업무도 아닌데 왜 나에게 전화를 한 걸까. 굳이 사무실에 없는 사람에게 휴대폰으로 걸어서 물어보는 그 심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담당자가 누군지 알려면 시스템을 조회해야 하는데 오늘 휴가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대답했다. 울컥 짜증이 나서인지 말을 하며 손에 자연스럽게 귀를 가져갔는데 이상함을 느꼈다. 진주 귀걸이 한쪽이 사라진 것이다. 왼쪽 귓불이 텅 비어있었다.
대체 어디에서 잃어버린 걸까? 처음에는 직전 행선지였던 소바집을 떠올렸다. 지금이라도 다시 가볼까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딱히 소바집에서 귀를 만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심 가는 행동들을 떠올려보니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공항버스였다. 새벽에 추워서 마스크를 잠깐 했다가, 버스에 등을 대고 기대면서 마스크를 벗었는데 그 과정에서 귀걸이가 빠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오사카역으로 향하던 공항 리무진 버스에서 잃어버렸을 수도 있고.
그냥 없는 셈 쳐야겠다 했지만 남은 귀걸이 한 짝을 어디에 쓸까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물론 여행지에서 휴대폰이나 여권, 지갑을 잃어버린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지만 물건을 잃어버리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기분이 언짢아서 카페에서 글도 써지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읽으려고 갖고 왔던 뉴요커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또 회사에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카톡 화면에 내가 휴가 중 가장 두려워하는 모 선배의 연락이 와있었다. 전날 내가 하루 휴가라고 했더니 전화 꼭 받으라고까지 했었다. 역시나 메시지는 “통화 가능해?”였다. 이런 곳까지 와서 업무 전화를 받는 건 스트레스지만, 여행 온걸 안 밝히는 게 낫다. 난 최대한 기분을 가라앉히고 전화를 받았다.
선배의 질문을 들어보니 굳이 전화로 대답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내가 서너 번의 휴가 동안 항상 전화로 알려줬던 류의 질문이었다. 물론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 수는 있으나 굳이 전화로 물어보지 않고 문자로 물어봤어도 될 일이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선배가 통화 품질이 안 좋다며 물었다.
“너 혹시 해외니?”
내가 그렇게 내색하고 싶지 않았던 해외여행이 또 그렇게 밝혀졌다. 선배에게 들켰기 때문에 이제 모든 부서원에게 내가 오사카에 있는 게 전달되겠지. 오늘도 게임 오버, 나의 패배였다. 그래도 아직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핸드드립 커피하우스 아카네야에서 드립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먹으며 예약해둔 저녁식사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스마트폰 창이 번쩍였다. 또 선배에서 온 문자였다. 그런데 이번엔 장문의 업무연락이었다.
메시지 하나로 스크린을 가득 채울 만큼 긴 메시지였다. 다음 주 월요일에 복귀하면 열거한 조건을 다 담아 내용을 정리해 자료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엔 사장님까지 보고가 올라갈 수 있다는 주석도 덧붙여서.
시계를 보니 이미 업무시간이 지난 뒤였다. 회사에 갔어도 업무시간이 다 지난 저녁인데, 하물며 해외로 휴가를 간 사람에게 이런 업무 문자를 보내다니. 지금 미리 알려줘도 내가 여기서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월요일에 회사에서 하라는 건데 굳이 금요일 저녁에 이런 연락을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선배는 부장님은 아예 전화를 하라고 했지만, 내가 해외에 있다고 얘기하며 문자 수준으로 막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워커홀릭이 아니다. 난 휴가지에서까지 회사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사장님 보고’라는 단어가 압박으로 다가왔다. 저녁식사로 돈카츠를 먹는 중에도 업무연락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분이 나빴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 여행을 망친 사람들이 미웠다.
식사를 마치고 술을 마시러 갔다. 평소에는 먹지 않고 서랍에 잠들어 있던 히말라야 캡슐을 한 알 먹었다. 술을 마시기 30분 전쯤 먹으면 다음날 숙취가 없다. 이 숙취 약의 효능은 작년 회식에서 한 번 시험해본 바 있었는데, 연태고량주와 소주의 조합에도 끄떡없어서 믿을만했다. 우선 바 히라마츠에 갔는데 전체적으로 조용한 분위기라 가만히 있으면 계속 회사와 업무 생각이 났다. 머릿속에서 자꾸 월요일에 쓸 보고서의 개요를 그리고 있었다.
장소를 바꿔 숙소 3분 거리의 가게에 갔다. 어느덧 단골이 되어버린 바 베소였다. 바텐더님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대화도 좀 나누고, 다른 손님들과도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나마 회사일은 잊을 수 있었다. 사장님과 매니저님에게 휴가 중 업무연락을 보내는 행태에 대해 얘기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숙취해소제를 굳게 믿었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많은 술을 마셨다. 스트레스 때문에 오버페이스 해서 과음했다. 원래 내 주량을 훨씬 밑도는 술을 마시는데, 이날은 주량에 근접할 만큼 마셨다. 난 술을 깨려고 커피 이름 같은 카페 드 마티니를 주문했는데, 알고 보니 도수가 높은 칵테일이라 갑자기 확 취한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미리 먹어 두었던 히말라야 캡슐 덕분에 다음날 별다른 숙취는 없었다. 정말 신기하고 마법 같은 약이었다. 숙취의 대표 증상인 두통과 소화불량이 전혀 없었다. 간에 갑옷이라도 입힌 듯이.
그러나 일당백 하는 숙취해소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두통과 메스꺼움은 없었지만 피로까지 막을 순 없었다. 매우 피곤하고 졸려서 지금까지의 여행 중에 가장 늦게 기상했다. 열한 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정오쯤 숙소를 나가 지난달 친구가 점심을 먹고 극찬했던 쿠시카츠 다루마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콜라를 마셔도 갈증이 났다.
그 후엔 4시에 시작하는 축구경기를 보러 머나먼 스이타로 향했다. 벌써 세 번째 가는 길이라 익숙했다. 이 경기를 보기 위해 여행을 온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내 기력과 의욕은 바닥이었다. 선수들은 열심히 싸웠지만 이기지 못했다. 비겼지만 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먼 길을 되돌아왔다. 돌아가는 길에 지평선에 걸린 오렌지빛 노을을 보니 여행이 끝이 실감 났다. 아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또 회사 생각이 났다.
그놈의 회사 생각! 회사 생각이 날 때는 단골 가게에 가야 한다. 어느덧 오사카의 마음의 고향이 되어버린 베소에 갔다. 비록 문자 중계지만 축구를 보며 식사도 했고, 다른 단골손님과도 교류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돈을 지불하긴 했지만) 맛있는 칵테일은 덤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에 전날보다 일찍 가게를 나왔다. 사장님과 매니저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2박 3일 내내, 나의 여행과 동행한 회사 망령의 내력을 알고 있는 매니저님이 물었다.
“스트레스가 좀 풀렸나요?”
네, 적어도 그 시점에는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짐을 싸며 생각했다. 난 이런 여행을 원하지 않았노라고. 강가의 카페에서 진주 귀걸이를 잃어버린 순간부터 하나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단추를 잘못 끼기 시작한 것이다. 내 의지에 벗어나는, 내 통제를 벗어나는 여행이었다. 절도도, 강도도, 사고도 없었지만 행복하진 않았다. 작지만 확실한 불행, 소확불이었다.
난 아침 일찍 일어나 카페에서 글도 쓰고, 생각도 정리하고, 에너지가 꽉 찬 상태로 산책도 하고 싶었는데 하루의 절반이 피로한 상태로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여행이 짧았기에 더 아쉬움이 컸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월요병을 견뎌내고 출근했다. 그런데 내가 걱정했던 그 업무는, 사장님께도 보고될지 모르니 무지 중요하다고 했던 그 작업은! 사무실에서 뚜껑을 열어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휴가지에서 받았던 그 장문의 문자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 속 빈 위협에 불과했다. 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소중한 휴가를 망친 거지?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과거에 안주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너무 미래를 의식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것도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런 여행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여행으로 난 무언가 잃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온전히 못 누린 즐거움에 대한 기회비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실패한 여행처럼 보이는 것에도, 얻은 것은 있었다. 두려워 보이는 것은 막상 닥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미래는 포기하고 현재에 집중하자고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 내가 모든 여행에서 택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아니 꽤 많이 편해졌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11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