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손님끼리 교류하는 문화
최인아 책방에 갔다가 도보 6분 거리인 Bar 백야에 갔다. 선정릉 뒷길로 걸어오니 금방이었다. 직원은 사장님 혼자셨다.
사장님에게 10년 전 한국의 바 문화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웨스턴 바였다. 가끔 플레어라고 듣던, 셰이커로 저글링 비슷한 기술을 선보이거나 불쇼를 하던 바였다. 그 외에 처음 알게 된 문화가 하나 있었다. 지금은 개인주의 때문에 각자의 시간과 장소를 침범하지 않아 손님 간에 전혀 교류가 없는 편이지만, 10년 전 웨스턴 바 시절에는 단골손님들끼리 (모르는 사이다라도) 인사하고 술도 한 잔씩 주면서 나중엔 서로서로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친구, D에게서 들었던 그녀의 단골 바 풍경도 이 웨스턴 바 문화와 동일했다. 컬트 카페라는 곳인데, 처음엔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단골들끼리 자연스럽게 말을 나누다가 친해졌다고 했다. 그래서 언제든 컬트 카페에 가면 꼭 아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뉴욕에서 웨스턴 바 문화를 접한 적이 있었다. 뉴욕은 미국이니 웨스턴 바 문화인 게 당연하겠지만, 대도시라 그런지 그리스 아테네보다는 개인주의가 강해 보였다. 도시 사람 특유의 깍쟁이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래도 내가 뉴욕에서 가장 처음 방문한 바, 데드 래빗에는 친절하고 사교적인 손님들이 많았다. 서로 대화를 나누길래 일행인 줄 알았던 사람들도 알고 보면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일행 중 한 명이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이름을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미드타운 근처의 샤브샤브집을 소개해줬다. 인근의 The Growler의 바텐더인 매튜라고 했다. 가장 늦게 합류한 사람은 단테에서 일한다고 했다. 단테는 월드 베스트 바에도 선정된 곳이었다.
며칠 후, 나는 단테를 방문했고 서비스로 작은 그래스호퍼 칵테일 잔을 받았다. 데드 래빗에서 만난 직원 덕분이었다.
일본에서 처음 접한 바는 도쿄의 바였는데, 친절하였으나 손님과의 교류는 거의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복장도 정장인 곳이 많았고 각이 잡혀 있었다. 한마디로 굉장히 격식 있는 분위기였다. 한 군데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 곳이 줄줄이 비슷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일본의 바들은 모두 포멀 하다는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
오사카에 가서야 그 선입관이 사라졌다. 백야 사장님이 얘기했던 그 ‘웨스턴 바’ 문화를 경험한 건 오사카 기타 구에서였다.
사실 오사카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서울 논현동의 바 임바이브 덕분이었다. 임바이브의 사장님은 오사카의 바 히라마츠에서 수년간 일하셨다. 그래서 우메다 근방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단골손님들은 사장님을 알았다. 내가 먼저 임바이브 얘기를 하지 않아도,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하면 임바이브의 마스터를 아냐고 먼저 물어보셨다.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이 있기 때문인지, 처음 알게 된 사람들끼리도 어렵지 않게 대화를 나누었다. 가게가 크지 않아 더 친근한 분위기였다.
옆자리에 고베에서 온 손님 두 명이 있었다. 그 손님들도 한국의 임바이브 사장님을 잘 알고 있었다. 내 일본어가 짧아서 깊이 있는 의사소통은 되지 않았지만, (일본어가 짧은 손님들에 익숙한) 바텐더님들 덕분에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 손님 덕분에 오바 카이토 씨의 바카디 대회 출품작인 ‘라구나 로사’도 마셔볼 수 있었다.
축구장에 갈 때마다 그 큰 경기장에 사람이 많이 차고 때론 매진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일본에서도 축구보다는 야구의 인기가 높아 보였다. 두 바텐더님 뿐만 아니라 고베의 손님들 모두 한신 타이거스의 팬이었다.
지도만 봤을 때는 고베가 상당히 멀다고 생각했는데, 손님들의 얘기를 들으니 JR로는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놀랐다. 생각보다 고베는 가까운 곳이었다. 오사카를 세 번이나 갔는데도 고베에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니 좀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JR로 30분 거리라도 자정이 넘으면 차가 끊기지 않나? 나야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숙소가 있어서 부담이 없었지만 저분들은 우버를 부르는 건가? ‘우메다에서 고베까지 가려면 10만 원은 들지 않을까’ 라며 남 걱정을 하고 있다 보니 또 다른 손님이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왔다.
새로 들어온 사람은 나이가 지긋하신 손님이었다. 머리도 수염도 희끗희끗했다. 손님을 대하는 분위기에서, 그 손님도 이 가게의 오랜 단골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조금 후 갑자기 주방과 바가 부산스러워졌다. 그러더니 생닭 냉채류를 담은 접시가 나왔다. 자세히 보니 닭가슴살 숙주 무침이었다. 접시를 나에게 주시며 먹을 만큼 덜어가라고 했다.
나도, 고베에서 온 손님도, 생닭과 숙주를 먹을 만큼 덜었다. ‘웬 닭이지?’ 했더니 방금 전 계단을 내려온 단골손님이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 손님은 가게 근처 어딘가의 셰프였는데, 가게를 마감하고 남은 음식을 바의 손님들에게 나누었다. 생닭은 처음 먹어봤는데 마치 참치 다다키를 먹는 것 같았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 임바이브 사장님에게 이 일화를 얘기하니, 일본에서는 생닭 요리가 흔한 편이라고 했다.
다음날, 축구 경기를 보고 나오니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짧은 여행의 끝이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여행이 끝나는 것도 아쉽지만, 곧 출근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짐이 되었다. 저 노을은 일상을 잠시나마 탈출했던 나에게 현실을 뼈저리게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 현실을 조금이나마 잊기 위해 다시 바 베소로 향했다. 스타벅스에서 추천하는 ‘오늘의 커피’처럼, 베소에서 추천하는 ‘오늘의 칵테일’은 패션후르츠 칵테일이었다. 상큼한 과육이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 빨대로 칵테일을 힘껏 빨아들인 뒤 스푼으로는 가니쉬로 올려진 패션후르츠를 남김없이 비웠다.
그날 동시간대에 맨체스터 시티와 토트넘 핫스퍼의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해외라서 어차피 서비스도 되지 않았지만, 공공장소라서 영상 중계를 볼 수는 없었다. 한 손으로는 칵테일 잔을, 다른 손으로는 아이폰 화면에 뜬 문자중계를 쓸어내렸다. 나는 토트넘 팬은 아니었으나, 내가 응원하는 팀이 우승하기 위해서는 토트넘의 힘이 필요했다. 안타깝게도 토트넘은 시작하자마자 실점한 채로 시작했다. 불운하게도 주전 골키퍼 요리스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고, 백업 골키퍼는 경기가 시작한 지 5분 만에 선제골을 허용했다.
그 경기가 끝날 때까지 나는 같은 곳에 머물렀는데, 스코어는 결국 변함이 없었다. 그날 직접 관람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고, 문자 중계로 본 남의 팀 경기도 이기지 못했다.
사장님은 마침 내가 그날 축구경기를 보러 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겼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비기다는 단어를 몰랐기 때문에, 양손가락으로 1을 만들며 “이치토 이치(1과 1)”이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사장님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셨다.
그때쯤이었다. 사장님이 내 왼쪽에 앉은 손님과 눈이 마주쳤고, 내가 축구를 보러 한국에서 왔으며 임바이브도 물론 잘 알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그 손님은 매우 반가워하면서 임바이브 최사장님이 오사카에서 일하던 가게인 바 히라마츠의 단골이라 잘 안다고 했다.
히라미 씨는 유쾌했고, 히로미 씨는 상냥했다. 정말 임바이브의 최사장님의 단골이었는지, 한국 가게에서 즉시 사용 가능한 한국어를 수준급으로 구사하셨다. 할 줄 아는 한국어가 다양하진 않았지만, “한잔 더 주세요” 라든가 “물 주세요”라는 말은 그 억양과 발음이 매우 자연스러워서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다음 날 일찍 공항에 가야 해서 그 전날보다 일찍 가게를 나왔다. 바 베소와 함께한 이틀은 즐거웠다. 현지인과 대화를 나누고 교류하는 시간은 이번 여행에서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인터넷 어디에선가 여행에 대한 단상을 읽었는데, 그 나라 사람과 10분 이상 대화를 나누었다면 그것은 여행이고, 그렇지 않다면 관광이라는 짧은 글이었다. 그에 따르면, 난 이번에 관광이 아닌 여행을 한 셈이다. 모두 오사카 바 베소에서 만난 웨스턴 바 문화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