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나러 갑니다
2016년 7월 12일 화요일
조병운은 교차로에서 김희수의 외근지로 가는 중이다. 오늘 김희수는 강의 일정이 있다. 15분 정도 걸어가야 하므로 번거롭긴 하다만, 그에겐 전해야 할 소식이 있다. 꽤 불편한 소식이.
오늘 아침, 병운은 희수에게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오늘 점심 있니? 희수는 대답했다. 아니요, 오늘 강의 준비 때문에 도시락을 먹으려고 따로 점심을 잡진 않았습니다. 그래? 오늘 나도 도시락 먹으려고 하는데 같이 내려가자. 내가 살게.
어제 희수를 닦달한 게 마음에 걸려서, 이런 방법으로 짐을 덜고 싶었다. 도시락이라고 우습게 봤는데, 이 주변은 도시락도 비싸다. 무슨 도시락이 8천 원이나 해? 그러나 부장 체면이 있지, 최대한 티 내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8천 원이든 만원이든 상관없다. 내 카드인가? 법인카드인데 뭘.
희수가 도시락이 맛있다며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그래, 가끔씩 이렇게 사주면 되지 뭐. 엘리베이터에서 얘기했다. 너 바를 정 하나다. 네? 바를 정이요? 어, 너 한 번 내가 사줬다고. 한 과장, 넌 바를 정 두 개야. 한 과장은 어제도 병운과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오늘도 도시락 사는데 따라오는 바람에 비용이 더 늘었다.
도시락을 다 먹고 자리에서 좀 졸고 있으려니, 김 부장이 부른다. 상반기 고과가 나왔다고. 고과를 오픈해보니 병운이 줄 세웠던 순서와 같다. 조병운 대신 임원에게 보고를 해주고, 그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김영민의 고과가 가장 중요하다. 김영민을 일등으로 써냈다. 영민은 휴일에 병운과 함께 골프를 쳐주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 부서에 말 안 듣는 일원이 있을 경우 병운의 메시지를 대신 전달해준다거나, 행동대장의 역할도 수행한다. 계속 고과를 잘 챙겨주지 않으면 병운에 대한 충성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방심할 수 없다. 아, 정말 피곤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누군가는 정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게 회사생활이고 이게 인생인걸. 싫으면 너네가 나가야지.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라.
사실 조병운은 김영민의 고과 외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러나 하위 고과는 얘기가 다르다. 부서의 누군가가 하위 고과를 받으면, 어쨌든 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한다. 싫은 소리는 병운이 제일 피하고 싶은 것 중 하나다. 그래서 웬만하면 하위 고과는 받지 않으려 하지만, 상위 고과가 필요할 땐 어쩔 수 없이 하위 고과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뭐, 윗선에 강하게 얘기하면 상위 고과도 가져오고 하위 고과를 막을 수 있겠지만 병운은 강자에 강한 스타일은 아니라, 인사권자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 없다. 그러나 영민의 충성을 약속받기 위해서는 그에게 줄 상위 고과가 필요하다.
싫은 소리를 꼭 해야만 한다면, 만만한 사람에게 하자. 김희수는 부서 막내이다. 당연히 업무도 다른 부서원보다 상대적으로 빛이 덜난 잡일들이 많다. 희수가 부서에 발령받아 온 첫 해에도 하위 고과를 줬다. 그때도 싫은 소리를 꺼냈지만 희수는 별 다른 말 없이 받아들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업무가 빛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옛 생각을 하다 보니 15분이 금세 지나 희수가 강의하는 강당에 도착했다. 시간 계산을 잘못했는지 그녀가 강의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강의는 다 끝났고, 고객들은 떠났다. 희수는 병운이 온다고 해 집에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에 갔다. 나름대로 어렵게 첫마디를 열었다. 넌 이제 대리가 됐어. 경쟁자들이 쟁쟁해졌어. 체급이 딸려. 고과가 안 좋다.
1년 반 전처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는데 희수의 반응이 예상 밖이다. 흔들리는 눈동자, 살짝 눈물이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끝내 울지 않는다. 입술을 깨물다가 말을 꺼낸다. 부장님이 오시고서 전 하위 고과를 두 번 받았습니다. 만 2년간 두 번, 솔직히 저는 제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인가, 이렇게 되면 회사 생활을 계속해야 할지 회의가 들 수밖에 없습니다. 희수는 명확한 이유를 요구하지만 병운이 할 수 있는 건 병운이 준 업무 자체가 빛나지 않는 것, 그리고 체급이 달라졌다는 추상적인 대답뿐이다.
희수가 당돌해진 게 괘씸하다. 병운은 화제를 바꿨다. 네가 진급한 게 네 힘만으로 된 줄 아냐, 나도 어필했고 회사도 고민 많이 했다. 희수는 반론을 제기한다. 이번에 우리 본부에서 대리 누락자가 없지 않았느냐. 순간 말문이 막힌다. 사실이었으니까. 병운은 다소 자신 없이 대답한다. 네가 됨으로써 누군가 과장이 누락됐겠지. 병운은 자신이 없어진다. 희수가 스스로 노력한 부분을 얘기했기 때문이다. 사실이다. 병운이 1년 반 전에 준 고과 때문에 희수는 그것을 메꾸기 위해 1년을 자격증과 어학공부에 매진했다. 모든 주말을 희생한 결과, 두 개의 핵심 자격증과 두 개의 어학 등급을 따냈다. 사실 병운은 그가 얘기한다고 해서 희수가 모든 걸 해내리라고 생각지는 못했다. 그건 단지 하위 고과를 주기 민망했기에 그저 내뱉은 말이었다. 고과를 주며 얘기했다. 앞으로 1년간 할 수 있는 모든 자격과 어학을 따라고. 그래야 대리가 될 수 있다고.
다시 희수가 눈앞에 있다. 이제 그녀는 할 말이 있으면 참지 않고 말한다. 생각 같아선 잔뜩 혼내주고 싶지만 병운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사람이 6개월 동안 벌써 3명이다. 자칫하다가 희수까지 이상한 소리를 했다간 안 그래도 위태로운 목숨, 더 위태로워진다. 살살 달래서 보내자.
희수야, 다음에 좋은 고과 받으려면 더 열심히 일하고. 일단 내가 밥 좀 많이 사줄게. 참, 그리고 하나 생각해봐라. 이제 머리가 커서 주장이 생긴 것 같은데, 할 일 다 하면서 할 말도 다하는 사람이 될 건지 아니면 그저 당돌한 사람이 될 건지.
밥도 사준다고 했고, 그녀에게 맞는 조언도 했으니까 병운은 스스로 만족스럽다. 결국 마지막에 희수는 수긍한 듯한 낯빛을 보였다. 지가 부서장한테 별 수 있어? 우리 땐 부장이 결재판을 던졌었다고.
조병운은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에겐 착한 사람 증후군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사실 그래서 싫은 소리를 싫어한다. 그런데 희수가 진심으로 병운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 같진 않다. 그녀의 눈동자, 굳게 다문 입, 그리고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희수에게 화풀이를 하고 핀잔을 줬던 지난 2년의 기억들. 분명 어디에선가 병운의 욕을 할 것 같다.
오늘 바로 집에 들어가니? 병운이 물었다. 네, 집에 가서 쉴 거예요. 아, 다행이다. 부서원 누군가와 술이라도 마실까 봐 걱정했다. 병운은 평소에도 부서원들이 자기 없이 모이는 것을 극히 꺼려서, 부서원들이 업무 시간 이후에 개인적으로 저녁 먹으러 가는 것도 감시했으며 때로는 혼을 내기도 했다.
희수의 뒷모습이 멀어져 간다. 개찰구를 찍고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싶지만 병운도 갈길이 멀어 귀찮다. 이젠 그만 철수다. 혹시라도 내일 고과 소원이라도 할까 봐 일부러 여기까지 번거롭게 걸어왔다. 그건 그렇고, 이제 희수도 머리가 커져서 이런 역할을 맡기기에 귀찮아졌다. 빨리 새로운 사원이 들어와야 하는데. 이왕이면 아직 의욕과 애사심이 충만한, 기합이 바짝 들고 예스맨인 인물로. 다음 고과 시즌에 대비한 새로운 먹잇감을 찾을 때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