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토리걸
2016년 7월 15일 금요일,
비
연말에 송년회로 바에 가자고 얘기하고선 무슨 연유로 그 후 보름 만에 바를 방문했는지, 나도 D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쨌든 그해 7월, 나는 처음으로 바(bar)라는 곳에 발을 들였다. 외근 후 현지 퇴근이라 일찍 끝난 날이었다.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합정역 부근 작은 카페 창가 자리에서 D를 기다렸다.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곧 비가 내렸다.
그 후 합정역에서 상수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가게 오픈 시간인 저녁 7시에 정확히 맞추어 도착했다. 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인상적인 글을 보았다.
Love Drink,
Trust Bartender
마치 "약은 약사에게, 술은 바텐더에게"와 같이 입에 착착 감기는 문구였다. 잘 쓰인 카피 같았던 글귀가 꽤 마음에 들었다.
D는 일전에 삼촌과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한 번 정도 더 왔다고 했다. 나만 초행이었다. 사실 바 자체가 처음이어서 모든 게 새롭고 생소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의 오너 바텐더님은 유명하고 경력도 긴 분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아직 시간이 일러서 그분은 부재중이었고 남자 바텐더 두 분이 가게를 오픈하던 참이었다.
바(bar)라는 곳은 단지 술만 제공하는 곳은 아니었다. 바텐더와 손님의 커뮤니케이션이 칵테일을 맛있고 능숙하게 만드는 것 이상으로 중요해 보였다.
방문한 바의 리스트가 늘어갈수록,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에 대해 절감했다. 손님은 실망하면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
이곳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됐다던, 우리와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던 바텐더님과의 대화가 아직까지 생생하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주요 화제는 내가 오랫동안 고민하던 바를 깊숙하게 찌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지 6년째였다. 눈이 초롱초롱하던 신입사원 시절도 있었지만, 열정은 오랜 실망 끝에 꺼진 지 오래였다. 회사생활의 고비가 온다는 3, 6, 9년 중 두 번째 고비였다.
절대 회사생활로는 자아실현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회사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은 아니다." "회사에서의 삶과 개인적인 삶을 철저하게 분리해야 한다." 등은 당시 나의 철학과도 같았다. '퇴사 학교'로 시작된 퇴사 트렌드가 본격적으로 화두에 오르던 때였다. 나를 오랫동안 괴롭히던 고민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비본질적인 정치적인 조직 생활과 적성에 맞지 않는 업무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퇴사에 동참할 생각은 없었지만, 회사에서 상처를 받을 때마다 나는 마음의 문을 하나씩 닫기 시작했다. 결국 작년 여름쯤, 회사란 나에게 생계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 더 이상 상처를 받아도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점차 무감각해졌다.
그는 서른에 바텐더 생활을 시작했다고 얘기했다.
"제가 좀 늦었죠? 원래 다른 직업이 있었어요. 공기업에 다녔죠. 금전적으로는 안정적이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어요. 내 일이다 싶은 그런 게 부족했죠. 전 결국 회사를 나와서 식음료 쪽으로 진로를 바꿨어요."
직업을 바꾼다는 건 감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난 항상 이직을 해도 회사원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때 그의 다음 한 마디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데 7년 정도 걸린다고 해요. 그럼 우리는 평생 동안 10번쯤은 전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그동안 너무 용기가 없었던 게 아닐까?
사회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20대 중반만이 직업의 선택권을 가진다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로맨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늦은 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후 몇 번의 주말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여러 권 읽었다.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작가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가가 되기 전에 요식업 사장이었다. 가게를 운영하던 중 어느 날 운명처럼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밤늦게 가게 문을 닫고 새벽까지 부엌에서 글을 썼다.
'글을 쓰는 하루키'가 '사장 하루키'의 아이덴티티를 넘어서기 시작할 때, 그는 가게를 팔고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전념했다.
나도 하루키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당연하다. 왜냐면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2년 반이 지나고, D가 삼촌과 함께 그 가게에 다시 들렀을 때 바텐더님을 만날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그분은 그때의 대화를 기억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