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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티하이커 Dec 24. 2020

여행의 방법

선여행 후정보

2016년 7월 26일 화요일


그동안 내가 잘못 생각했다.


나는 '아는 것이 힘'이라고 생각했다. 아는 게 있어야 그 지식을 바탕으로 여행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온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여행 가기 전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해 대략이나마 공부했으며 각 관광지의 내력에 대해 조사했다. 최근에는 '문학 기행', '영화 기행'과 같이 그 여행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과 영화를 모두 접한 후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일본 스토리 여행>과 같은 여행 에세이처럼.


그러나 내가 틀렸던 것 같다. 그곳에 대해 사전 지식을 쌓은 후 직접 마주쳐 얻는 감흥, 그리고 아무 정보 없이 백지상태로 순전히 '자신의 느낌'에만 의존한 감상 중 무엇이 더 감동적일까?

정보를 획득한 상태에서 '실제'를 보는 것과, '실제'를 본 상태에서 사후에 정보를 파악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인상적일까?

나는 그동안 전자가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동안 수차례의 여행을 돌이켜보니 후자가 옳았다. 도리어 가이드북 등의 정보로, 여행지에 가보지도 않고 생긴 선입견이 여행에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지난 몇 번의 여행 중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떠올려보니 그러했다.

1. 2010년 히로시마, 히로시마 미술관

히로시마 미술관에서 피카소 청색시대 그림인 '바의 딱딱한 의자'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이 그림 하나만으로 다시 히로시마에 갈 이유가 생겼다. 그건 사전에 그 그림에 대한 어떠한 지식 하나 없이 얻었던 감동이었다. 청색시대의 작품이라는 사실과 그림의 이름은 한국에 돌아온 후 알게 됐다.


2. 2011년 상하이, 푸동 지구의 야경

가이드북에서는 마천루 위에서 본 야경이 훌륭하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땅 위에서 마천루를 올려다본 모습이 장관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으며, 흔히 알던 사실과 정반대였다.

3. 2012년 쇼도시마, 태풍이 지나간 후의 엔젤로드

태풍은 예측지 못한 변수였다. 태풍이 오지 않았더라면 폐허 뒤에 잔잔히 자리 잡은 평안을 만날 수 있었을까.

4. 2015년 다롄, 성해 광장

가이드북 설명만으로는 하찮고 평범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가이드북만 믿고 가지 않았더라면 후회할 뻔했다.


충동적으로 항공권을 예약하고 열흘 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다녀왔던 다롄 여행. 눈에 띄는 유명 관광지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머리를 식히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특히, 성해 광장은 기대 이상이었다.

주변의 초호화 고층 아파트들과 어우러진 넓고 깨끗한 녹지의 광장, 그리고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물결 모양의 석조.

사실 그때 마음의 걱정거리가 하나 있어서, 한숨을 쉬며 경사진 벼랑에 앉아있었다. 건조한 햇살을 받으며.


당시에는 매우 심란했지만 내 마음과 대비되는, 주변의 활기찬 중국인 가족들, 연인들이 어우러진 풍경. 그 장면과 상황이 잊히지 않은 채, 머릿속에 뚜렷하게 사진처럼 남아있다.

5. 2016년 홍콩 : 홍콩 트레일 폭푸람 컨트리 파크
홍콩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정보는 여행에서 얻은 감동과 무관했다.


홍콩 트레일을 걷던 중, 야트막한 능선을 오르내리다가 ‘바로 이 곳이야’며 탄성을 외친 곳을 발견했다. 내 눈이 카메라라면, 이 곳이 가장 아름다운 풍경의 기억을 담은 장소일 것이다.

능선 위에서 시원한 바람과 함께 한적하고 여유로운 전망이 펼쳐졌다. 능선을 넘어가면 다소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오는데, 그곳은 풀숲에 숨겨진 정말 아늑한 장소였다.


내리막 길 중간에 앉을 수 있는 바위가 있어서 잠시 앉아서 쉬었다. 머리 위로는 풀숲이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었고, 때마침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위의 풀 흔들리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쉴 수 있었다. 풀숲이 바람을 막아주어 햇볕만이 위에서 비쳤고, 따뜻했다. 나만 시간이 멈춰 있는 느낌, 나를 둔 채로 시간이 지나가는 평온한 느낌이 정말 좋아 20분 넘게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마치 다롄 여행 중 성해 광장에서 느꼈던 인상 같았다.

대리석으로 빛나는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

6. 2016년 그리스,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은 내부 관광을 생략하고 멀리서 바라본 것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아테네에 도착한 첫날, 갓짜낸 신선한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국립정원과 자피온 근처를 걷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탁 트인 곳이 있어서 걸어 나와봤더니, 대리석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경기장이 있었다. 저곳이 내가 아침에 조깅하고 싶었던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진에서는 잘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 내 두 눈으로 본 경기장은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반사해 반짝반짝 빛났고, 탁 트인 공터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마치 이 세상의 풍경이 아닌 것만 같았다. 너무 멋지고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풍경에 감동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결국 '실제'를 본 후 나중에 여행을 다녀온 후 궁금한 부분에 대해 찾아보는 게 대부분의 경우에 더 나은 것 같다. 왜냐면 '실제'는 여행지에서 오감으로 체험하는 것이므로, 모든 감각이 임팩트 있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더라도 그 장면을 다시 읽거나 보지 않은 채 생생히 복기해내기는 어렵다. 그래서 활자나 영상으로 봤던 내용을 여행지에서 실제로 본다 해도 감동이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체험을 통해 얻은 감동은 다르다. 여행지에서 오감으로 느낀 감각은 몸이 기억한다. 순서를 바꿔서 실제 체험으로 느낀 감동을 활자나 영상을 통해 다시 떠올리는 것은 훨씬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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