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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티하이커 Mar 24. 2019

그 문을 열지 않았다면

역삼동에서

2016년 7월 30일 토요일


그해 여름은 기록적인 폭염의 시기였다.

D와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는 샤갈 달리 뷔페 전에 갈 예정이었다. 그 이후엔 역삼동의 루프탑 바에서 한 잔 하기로 했다. 그런데 오전에 액자를 찾으러 걸어갔다가 그만 더위를 먹어버렸다. 나는 D에게 더위를 먹었으니 낮에 전시회를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조금 후 답이 왔다.
"아픈데 그냥 오늘 쉴래?"

여기서 "그러자"라고 했으면 그해 하반기의 내 삶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괜찮아. 이따가 저녁엔 해가 지니까 괜찮을 거야. 역삼에서 저녁이나 먹자."




한 시간 이른 시간에 역삼에 도착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사실 그 어떠한 바도 오픈하지 않은 때였다. 남는 시간 동안 역삼동 폴 바셋에서 블로그 리뷰를 검색했다. 원래 가려던 루프탑 바보다 평이 좋은 곳을 발견해, D에게 그곳에서 만나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바의 입구, 2016년 8월

역삼역에서 르네상스 호텔 사거리 방향으로 한참을 걸어 신라스테이 역삼 별관 2층에 도착했다. 혼술 하러 간 건 아니었지만, 혼자 들어가려니 긴장됐다.

웅장한 바의 정경

그러나 용기를 가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오른편에 웅장하고 넓은 바가 있었다. 초행길의 손님을 압도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만, 아직 오픈 시간이 아닙니다. 잠시 소파에 앉아 계시면 물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당시 네이버 플레이스에는 6시 오픈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는데, 실제 오픈 시간은 7시였다. 영업시간까지는 10분 정도 남은 상태였다.

첫 잔은 물이었다

나는 아직 일행이 오지 않았다고 설명했고, 7시가 되면 바 자리에 앉기로 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차가운 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당시 내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더위를 가시게 하는 시원한 냉수를 마셨다.

헤밍웨이가 사랑한 프로즌 다이키리

당시 D의 삼촌이 저술한 <술꾼의 품격>을 읽고 있었다. 마치 수학의 정석에서 집합을 가장 많이 공부하는 학생처럼, 그 책의 챕터 1이었던 '캐리비언의 해적과 럼' 이야기를 제일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책에 나오는 럼을 다 정복해 보겠어! 그리고, 이곳에서 <노인과 바다>를 쓴 헤밍웨이가 사랑했다는 프로즌 다이키리를 주문했다.

프로즌 다이키리를 반쯤 마셨을 때, D가 도착했다. 은희는 당시 그녀의 넘버원 칵테일이던 모스코 뮬을 주문했다.

주린 배를 움켜잡고 말했다. 이제 둘이 됐으니 얘기할 수 있어.
"저희 배고픈데 여기 안주 있나요?"
수염이 인상적인 바텐더님이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희 바에 셰프님이 계십니다."

마치 노래방 책 같은 메뉴를 뒤적이다가 차돌박이 까르보나라를 골랐다. 까르보나라에 베이컨이 아닌 차돌박이? 맛있겠다, 이거 먹어보자.

차돌박이 까르보나라

독특하게 소고기가 들어간 까르보나라였다. 지금까지 먹어본 까르보나라 중 최고였다. 살짝 매콤하면서도 버터향이 아른한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우와, 제가 먹어본 까르보나라 중 가장 맛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셰프님이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셔서 8월까지만 나오세요."

이날은 7월 30일이었다. 이곳의 안주를 먹을 수 있는 시간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 거짓말 같지만, 술이 아닌 안주 때문에 그 후 자주 이곳에 방문하게 되었다. 8월까지 최대한 안주를 많이 먹어보자면서.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절판 마케팅이 아닐 수 없다. 보험영업을 우습게 뛰어넘는 놀라운 영업력이었다.

<술꾼의 품격> 챕터 1을 마스터하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다음 잔도 럼을 외쳤다.
"칵테일을 마셔봤으니, 이번엔 스트레이트로 마시게어요."
"스트레이트요?"
바텐더님은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잘 숙성된 다크 럼 보틀들을 바에 올려놓았다.

Havana Club 7y, Coffee Bar K

"하바나... 쿠바의 수도네요."
영화 <더티 댄싱 2, 하바나 나이트>를 보고 쿠바의 수도가 하바나라는걸 알고 있었다.
그 이름에 끌려 하바나 나이트 7년을 선택했다. 금색 빛 실크 같이 부드러웠다. 살짝 달면서도 어느 정도 독기를 가진 럼이었다.

그 후에도 우리에게 럼이며 위스키에 대한 지식을 충실히 전달해 주었던 바텐더님은 앱설루트 보드카에 자몽 주스와 토닉 워터를 섞고 자몽 과육을 떨어 뜨려 슈터를 만들었다.
"선물입니다. 자몽 슬래머라고 해요."

그렇게 우리의 여정은 종료됐다. 더운 한여름밤에 딱인 상큼한 막잔이었다.

만약 저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았다면, 좋든 나쁘든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역삼동의 어느 바 때문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처럼 말이다.

저 문을 열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돈이 좀 더 많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 감량했던 체중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특별히 과음한다거나 해서 건강을 잃지는 않았다. 이제 '새로운 세계'가 아닌 '익숙한 세계'가 된 이상 예전처럼 안 마셔본 주종을 마셔본다든가, 새로운 곳에 가보려고 하지 않는 편이다. 적게 마시고, 가끔 방문하며, 글을 쓸 따름이다.

내가 저 문을 열고 들어가서 잃은 것은 약간의 돈이다. 내가 저 문을 열어 얻은 것은 새로운 글감이다. 단순히 기록하기 위해 썼던 리뷰들이 횟수를 거듭하며, 내가 쓰는 모든 글에 영감을 주었다. 그만큼 풍부한 글의 재료가 된 것이다.

수없이 기록하는 동안, 나는 계속 더 나은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싶었다. 술에 대해 쓰던 짤막한 기록들이 몇몇은 퇴고 끝에 에세이로 변했다. 스피릿이라는 독특한 글감과 바에서 만난 여러 군상들은 종종 삶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자신보다 글 쓰는 삶을 더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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