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티하이커 Jul 30. 2021

엄마와의 눈치게임

광안동 로우라

해파랑길을 걷고 용호동 스타벅스에서 쉬다가, 저녁을 예약한 로우라에 갔다.

시간이 애매하게 떠서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자마자인 다섯 시로 예약했는데 4시 50분경에 도착했다. 다행히 예약한 시간보다 일찍 들어갈 수 있었다.

가게에 들어가니, 곧 바 자리로 인도되었다. 단발머리의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이 가게의 시그니처 와인잔이 매력적이었다. 모든 자리마다 와인잔이 놓여있는 걸 보니 술을 시키는 것이 기본인 것 같았다. 친구와 왔으면 와인 한 병을 시켰겠지만, 엄마는 술을 잘 못 드시니까 큰 고민 없이 글라스 와인을 주문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메뉴에 따로 하우스 와인이 명시되지 않았다. 셰프님께 여쭤보니, 마치 ‘오늘의 와인’처럼 글라스 와인 품목이 매번 바뀐다고 한다. 거기까진 좋지만, 글라스 와인 가격을 미리 알 수가 없는 게 문제였다.

알고 보니 이날의 글라스 와인은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슬로베니아의 내추럴 와인이었는데, 한잔 당 2만 원 후반대의 가격이었다. 웬만큼 엥겔 지수가 높은 나도 놀랐으니, 엄마는 더 놀라셨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한 잔은 음료수를 마신다고 할 수도, 다른 곳으로 식사를 하러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본 안주는 호박 튀김이었는데, 기본적으로 가격에 비해 안주 양이 많지 않아서 이 호박 튀김으로 배를 일부 채웠던 것 같다.

엄마는 슬로베니아의 레드 내추럴 와인, 나는 같은 와이너리의 화이트 내추럴 와인을 마셨다. 나 혼자였더라면 다소 가격이 비싸도 편안한 마음으로 마셨겠지만, 엄마가 이 가격대에 어떻게 생각하실지 마음이 불편해서 가시방석에 앉은 채 저녁을 먹는 바람에 와인의 향과 맛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눈치게임이었다. 엄마도 아마 나처럼 가시방석이셨을 것이다. 내가 사드리는 저녁식사였기 때문에 어머니는 비싼 저녁을 드신다는 것에 부담스러운 마음이셨고, 나는 엄마가 그런 부담감과 미안함을 가지시는 게 더 죄송했다. 그래서 점심으로 복국을 먹을 때​보다 조용한 저녁식사였다.

가장 처음으로 나온 메뉴는 당근 샐러드였다. 새콤한 드레싱과 당근의 아삭아삭한 식감이 잘 어울렸다. 마치, 러시아 혹은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이 김치를 변형한, 당근으로 만든 김치가 이런 느낌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한국인의 입에 착 달라붙는 상큼한 샐러드였다.

두 번째 메뉴는 이곳에서 가장 맛있었던 아스파라거스 요리였다. 견과류와 계란이 어우러진, 자꾸 생각나는 감칠맛 넘치는 메뉴였다. 양이 더 많았으면 좋았을 걸, 뒤에 나오는 메인 디쉬 대신, 이 아스파라거스를 두 개 시킬걸 그랬다. 지금도 이 사진을 보면 그때의 아스파라거스가 무척이나 먹고 싶지만, 중곡동 마우로아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구운 알배추’라는 스몰 플레이트를 먹을 수 있는데, 가격은 훨씬 착하다.

메인 요리는 엄마의 취향인 토마토소스에 맞춰 소꼬리 살이 들어간 라구 파스타를 시켰는데, 내가 상상한 일반적인 라구 맛이 아니고 좀 더 갈비찜에 가까웠으나,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역한 향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 요리는 가격은 셋 중에 가장 비쌌으나, 만족도는 가장 떨어졌다. 가뜩이나 어머니는 양식을 좋아하시는 편이 아니라 엄마가 과연 이 요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의식하느라 더 심각하게 먹었던 것 같고, 아마도 엄마는 내가 사드리는 저녁이라 입맛에 맞지 않음에도 내색을 못하셨던 것 같다.

토마토와 올리브 안주는 당근 샐러드만큼 맛있었다. 이 가게는 메인 요리보다 애피타이저들이 더 맛있는 것 같다.

그렇게 엄마와의 눈치게임을 마치고 나왔더니, 6시를 넘겨 일몰시간이 지나 있었다. 원래는 캄캄한 광안리의 야경을 보고 싶었으나, 어쨌든 일몰이 지났기 때문에 광안대교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조금이라도 해변을 더 걷고 싶었기 때문에, 저녁을 먹은 곳이 역세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걸어서 광안역까지 갔다. 역 두어 개를 걷다 보니 어느새 하늘은 어둑어둑해져 칠흑같이 깜깜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이 멈춘듯한 복 요릿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