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도쿄
내 인생 첫 도쿄 여행은 테마여행이었다. 그 이름도, 마치 밤도깨비 여행 같은 느낌의 ‘1박 2일 긴자 바 투어’였다. 여행의 계기는 ‘루팡’이라는 유서 깊은 바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는 내가 처음 바에 갔던 ‘16년 7월, 서교동에서 시작된다.
#1 계기
2016년 7월 15일 금요일,
마포구 서교동
친구 D의 소개로 서교동 지하에 있는 ‘팩토리’라는 바에 갔다. 오픈 시간에 맞춰 갔더니 첫 손님이었다. 칵테일을 고르고, 위스키도 한 입 맛보고 안주로 브리 치즈도 먹었다. 한창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두 번째 손님이 등장했다. 혼술 하러 온 여자 손님이었다. 단골인 것 같았다.
바로 옆자리라 자연스럽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다. 근래의 한복 입기 트렌드 얘기를 하던 중, 갑자기 일본 여행으로 화제가 바뀌었다.
손님은 본인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구와 도쿄 여행을 갔어요. 저녁을 먹으러 긴자에 갔다가, 그냥 하염없이 돌아다녔는데 우연히 좁은 골목에서 철문을 하나 발견한 거예요. 철문은 무거웠지만, 힘을 주니 열렸고 지하로 계단이 이어졌어요. 계단을 내려가니 엄청 오래된 바가 나왔는데, 기모노를 입은 여자분이 있었어요. 바 구석에서 옆 사람에게 소곤소곤 얘기하고 있었어요. 마치 옛날 일본 영화에 나올 법한 풍경이었죠. 여행을 다녀온 후에 알아보니, 그 바는 루팡이라는 굉장히 유명한 바였어요. 다자이 오사무 같은 옛 문호들이 즐겨 찾던, 아주 유서 깊은 곳이라네요.”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나무 바에 앉아 소곤소곤 얘기하는 장면. 마치 검은 기모노가 사각사각 소리를 낼 것 같은 그 이국적인 장면에 이끌려 은희와 만장일치로 도쿄에 가기로 했다.
휴가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1박 2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긴자 바 투어에 집중하기로 했다. 루팡으로 시작된 바 투어였지만, 도쿄에 가기 전까지 서울의 텐더 바와 커피 바케이 한남에서 추천 바 리스트를 받았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을 4-5개 정도 추린 후, 9월의 뜨거운 도쿄로 떠났다.
#2 출발
2016년 9월 3일 토요일,
인천 중구 운서동
출발 전날, 여행지에서 태풍을 만날까 봐 걱정했다. 어머니는 "비행기가 못 뜨면 어떡하니?"라고 하셨다. 검색해보니 태풍 10호는 이미 지나갔고 12호는 일본 남부지방에 있어서 도쿄는 사정권이 아니었다. 그래도 일기예보엔 우산 그림이 있었다.
도쿄에 도착한 날 저녁 6시부터 새벽 내내 오는 비였다. 여느 때라면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닌 시간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메인은 긴자 바 투어로, 진정한 일정은 저녁 6시부터 시작된다. 안타깝지만 우산을 들고 투어 하게 됐다. 우산을 캐리어에 넣었다.
막상 다음날이 되자, 한국의 하늘은 맑았다. 비행기는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고 하늘로 향했다.
이번 좌석은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누릴 수 있는 창가 자리였다. 활주로가 스쳐 지나가고, 곧 바다가 나왔다. 하얀 물살을 가르는 선박들과 잔물결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거리가 멀어서인지 배도 그곳에 멈춰있는 것처럼, 물결도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사진처럼.
곧 엄청난 길이의 인천대교가 보였다. 눈어림으로 다리의 마디마디를 세어 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샹들리에 같은 현수교가 나타났다.
'앗, 저것은' 중얼 대는 사이에 암전 됐다.
온통 하얀 구름으로. 만약 이것이 영화의 장면이라면, 비행기가 구름을 뚫어 온통 하얀 안개에 휩싸이는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졌을 거다.
신비로운 느낌. 비행기를 꽤 많이 타봤고, 이륙도, 구름도 모두 익숙할 만큼 접했지만 이렇게 아름답고 정적인 순간은 처음이었다. 나 혼자만 잠시 세상에 놓인 듯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롭지 않고 온기를 충만하게 느낀 경험이었다.
비행기는 구름 층을 뚫고 성층권에 도달했다. 그동안 한 번도 발 밑의 구름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이날 처음으로 구름에도 산맥이 있고, 봉우리가 있고, 골짜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구름이 끊임없이 내달리는 지평선 가운데, 마치 백록담 같은 모양의 호수를 보았다.
두 시간의 비행 끝에 일본 동쪽 나리타에 도착했다. 구름이 아닌, 진짜 산맥과 바다가 탑승객을 맞이했다.
#3 식도락
도쿄 주오구 야에스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다행히 태풍은 없었고,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를 도쿄역 코인라커에 맡기고 야에스에 있는 모토무라 규카츠로 향했다. 소문난 맛집이라고 D가 미리 조사한 곳이었다.
원래 계획은 점심을 먹고 인근에 있는 교바시의 브릿지스톤 미술관에서 상설전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긴 대기줄 때문에 미술관 일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30분 정도 줄을 서겠지 생각했지만 결국 두 시간이나 기다려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도 떠나는 날까지 바 투어를 하며 술을 마셨으니 결국 먹는 것에서 시작해 먹는 여행으로 끝난 셈이다. 우리는 진정한 미식가(미식가라면 오랜 줄을 기다려 먹을 줄 알아야 한다)와 애주가(애주가라면 하루에 바를 서너 군데 도는 것은 기본이다)의 그램드 슬램을 달성했다.
#4 긴자 바 투어
도쿄 주오구 긴자
20세기 초중반의 문인들이 사랑한 유서 깊은 바, 루팡. 사실 이곳 때문에 여행이 시작됐으며, 나의 길고 긴 도쿄와의 인연도 여기에서 시작됐다.
사실 맛보다는 특별한 분위기 때문에 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굉장히 낡은 건물과 레트로 한 느낌과 더불어, 바텐더와 함께 세월을 간직해온 연세 지긋한 단골손님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바’보다는 관광지에 가까운 곳이지만 한 번쯤 특별한 경험을 위해 가볼만하다.
내자동 텐더 바 사장님의 스승님인 우에다 상이 이끄는 하드 쉐이킹의 명가, 텐더 바 긴자. 처음에 제자들이 만들었던 김렛은 조금 실망스러웠으나 우에다 상이 만든 시그니처 칵테일 맛은 훌륭했다. 그러나 자릿값인 커버 차지가 무려 1,800엔이었다. 거의 칵테일 한 잔 값이라 납득하기 어려운 가격이었다. 유명인의 하드 쉐이킹을 본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쉐이킹 장면을 촬영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안주로 입이 즐거웠던 커피 바케이 긴자. 당시 우리는 커피 바케이 역삼의 엄청난 단골이었기 때문에, 브랜드에 충성하는 마음으로 이곳을 방문했다.
솔직히 칵테일은 도수가 너무 높아서 우리의 입맛에 맞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츠 샌드, 프로슈토와 올리브, 홀그레인 소스를 곁들인 감자튀김 등의 안주가 너무 맛있어서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도수가 약할 거라 생각했던 피나콜라다에서 뒤통수를 맞고, 숙취 해소용이라 생각한 블랙 러시안에 된통 당하는 바람에 숙취로 인한 두통이 시작됐다.
그래서 마지막 종착지였던 오차드에서는 논알코올 복숭아 칵테일을 마셨고, D 혼자만 술을 마셨다.
이렇게 여러 군데의 바를 돌았지만 아주 늦지 않은 시간에 귀가했고 (호텔이 긴자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날 아침 짐을 챙겨 다시 공항으로 향하며 짧디 짧은 1박 2일의 일정이 막을 내렸다.
#5 도쿄를 떠나며
이 여행을 기점으로, 여행 일정에 목숨 걸지 않게 되었다.
이것저것 욕심부려서 다양한 테마를 남발하여 정체성이 모호한 여행을 하는 것보다는, 하나의 테마에 충실한 색깔 있는 여행을 하는 편이 낫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 한 가지 테마가 ‘식도락’이었을 뿐이다.
'이곳은 평생 한 번'이라든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은 너무 무리한 일정을 만들고, 다녀와서는 '내가 거기서 뭘 했지? 한 건 많은데 남은 게 없다'라는 허탈함을 남긴다.
“다음에도 또 갈 수 있으니, 이번엔 단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느끼고 경험하겠다”는 여유가 필요하다. 여행에도 여백이 있어야 예상치 못한 최고의 순간을 잡아낼 수 있다. 마치 주식투자에서 일생일대의 기회를 위해 항상 현금을 보유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