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도쿄
다이토구 우에노,
2017년 5월 1일 월요일
#1 여행 같지 않은 여행
매년 4월말에서 5월초엔 짐을 두둑히 싸서 여행을 떠났다. 그 시기는 직장인들에게는 최적인 황금 연휴이기 때문이다. ‘15년도에는 대련, ‘16년도에는 그리스를 여행했다. 그리고 ‘17년과 ‘18년엔 도쿄에 갔다.
여행의 횟수가 늘어남에 반비례하여, 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렘도, 여행을 준비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여행 일정을 미리 짜지 않은지는 꽤 되었지만 ‘17년도 황금연휴의 도쿄 여행은 근래 중 가장 게을렀다. 5박 6일의 일정 중에서 딱 절반인 처음 3일까지만 행선지를 정했고, 나머지 절반의 일정은 일본에 도착해서 생각하기로 했다.
게다가 거의 일주일에 육박하는 긴 시간을 도쿄에만 있었다. 근교 여행지인 하코네나 닛코에 갈 계획도 없었다. (요코하마는 혹시 몰라서 떠나기 전 여행 책자에서 관련 페이지를 카메라로 찍어 두었으나 결국 가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여행 같지 않은 여행이라고 할, 그런 여행이었다.
한 번쯤 시험 삼아 이런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여행자가 아닌, 그곳에 사는 사람이 된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 경험은 단지 에어비앤비에 묵는 것에서 오는게 아니라, 시간과 마음의 여유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데, 단지 유명하다는 이유로, 남들이 다 간다는 이유로 지친 몸을 이끌며 명소 투어를 다니고 인증샷을 남기는 여행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 매력 없다고 생각했던 도시, 도쿄의 숨겨진 이면을 보고 싶어서 <도쿄 일상 산책>이라는 여행책을 한 권 들고 떠났다. 도쿄의 골목길을 걸으며 도쿄 사람들의 일상을 엿보는 색다른 가이드북이었다.
처음 친구와 도쿄에 갔을 때는, 도쿄는 서울과 놀랄 정도로 닮아 있어 매력이 없는 도시라고 생각했다.
도시의 첫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시간에 쫓기지 않고, 넉넉한 일정이 있는 상태에서 관광지가 아닌 사람 사는 도쿄의 모습을 본다면 도쿄 역시 홍콩 만큼 매력적인 도시가 아닐까? 한 번 시험하는 셈 치고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을 정처없이 도쿄에서만 보냈다.
#2 나리타로 가는 길
황금 연휴였다. ‘분명 공항에 사람이 많겠지, 출국 수속에 시간이 오래 걸릴거야.’ 라며 평소보다 한시간 반 정도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당연히 잠도 덜 잤고, 네시 반에 기상했다.
그런데 막상 공항에 도착해보니, 예상보다는 사람이 적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면세장 에 도착한 시간은 탑승 두 시간 전이었다.
탑승구로 내려가기 직전, 주류 코너를 지나쳤다. 면세 코너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그 유명한 (진품보다 가짜가 더 많다는) 마오타이, 파인애플향이 인상적인 수정방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수정방을 한 병 샀을지도 모르겠지만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기 위해 단 한 병도 사지 않았다. 최고의 혜안이었다. 왜냐하면 나리타 공항 제3터미널에서 우에노의 숙소까지 이동하는 길은 정말 고생스러웠기 때문이다.
출국 40분 전에 게이트가 바뀌었고, 이륙도 30분 지연되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무엇인가에 홀린듯이 기내에서 간식이며, 식사를 추가로 구입했다. 좁디 좁은 항공기는 유료 식사와 안주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어느새 파티와도 같았던 시간은 끝나고, 비행기는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하늘은 어두웠다. 짙은 회색빛 유리창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숙소까지 갈길이 먼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3 ‘아오토’를 기억하라
나리타 제3터미널에는 제주항공 승객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한산한 입국수속은 처음이었다. 대신 공항 직원들은 세관 검색을 꼼꼼이 진행했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이었다. 옆 카운터 직원은 본인이 맡은 모든 승객들의 짐을 검사했다. 자국 국민이 아닌 이상 세관 검사는 형식적인게 당연했는데, 정말이지 일반적인 직업의식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서울은 낮 최고 기온이 28도로 여름에 가깝다는데, 나리타는 서울보다 6도나 낮았다. 덥지 않은건 분명 관광에는 청신호다. 그러나 비가 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왔다. 심지어 번개와 천둥을 동반했다.
처음 도쿄에 갔을 때는 여행 테마 자체가 '긴자 바투어'였기 때문에 숙소를 긴자에 잡았다. 그 때도 제주항공을 타서 제3터미널에 내렸는데, 다행히 도쿄와 긴자행 리무진 버스가 연계되어 있어서 편하고 쉽게 시내로 진입했다.
그러나 이번에 묵는 우에노에는 리무진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공항 철도의 일종인 스카이라이너와 스카이 액세스 특급 등이 게이세이 우에노역에 도착하긴 한다.
스카이라이너는 게이세이 우에노역까지 논스톱으로 운행하며, 소요시간이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다만, 편도요금이 ¥2,470으로 다른 열차들의 곱절이었다.
게이세이 본선은 편도 ¥1,030으로 가장 저렴한 대신에 90분이나 걸린다. 그래서 57분 걸리며, 비용은 ¥1,240인 스카이 액세스 특급을 선택했지만 하필 우에노역까지 직행하는 열차가 없었다.
스카이 액세스 특급은 번거롭게도 중간의 아오타역 등지에서 우에노행으로 갈아타야 하는 비운의 열차였다. 아무것도 모르다가 물어물어 '아오토'라는 역에서 환승하지 않으면 하네다 공항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는가. 말도 제대로 안 통해서 너무 힘들었다. 열차에서는 졸린데 졸지도 못하고, 딴 생각도 못하고, 구글맵을 켜 놓은 채로 '아오토'라는 단어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지도에서 확인하고 발음이 아오토라는 걸 알았지, 처음에는 역장 아저씨가 '아우토'라고 얘기하는줄 알고, 독일의 아우토반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피곤한 시간이었다.
힘겹게 환승의 과정을 거쳐 게이세이 우에노역에서 내렸다.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바닥은 축축했고 더러웠다. 웅덩이를 피해 캐리어를 끌고 아메요코 시장을 종단한 끝에 숙소에 도착했다.
#4 아메요코 시장
아메요코 시장은 숙소였던 호텔 도미인 우에노 오카치마치와 불과 3분 거리였다.
복권 가게와 카메라 상점을 지나 쭉 걸어가다가 꽃집을 만나는 순간부터 시장이 시작된다.
시장을 관통하는 중앙 거리 양옆으로 서서 먹는 선술집들이 많았다. 차마 먹을 용기는 없어서 구경만 했다. 구경만으로도 즐거웠다.
여행 첫 행선지는 우에노 공원으로 정했다. 구글맵에서 석양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에노 공원에 가려면 아메요코 시장을 지나야 한다.
시장은 매우 활기찼다. 그 에너지는 보다 젊은 나라인 중국이나 베트남을 떠올리게 했다.
선술집들은 이른 시간에도 낮술 손님으로 북적였다. 회사를 안 다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인가 생각하며 웃었다.
#5 우에노 공원의 저녁 노을
다행인건지 숙소에서 우에노 공원까지는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 구글맵 리뷰에서, 우에노 공원은 해질 때쯤 방문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여 산책하러 들렀다.
첫 인상은 평범했다. 상당히 넓은 공원이었다.
우에노 공원 한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잡은 야구장에 도착해서야 공원의 진가를 느꼈다. 그 때부터 오렌지빛 석양이 공원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에노 공원에는 국립 박물관 외에 두 개의 미술관과 한 개의 음악당이 있다. 국립서양미술관과 도쿄도 미술관 모두 훌륭한 기획전이 자주 열려서, 그것 때문에 비행기를 꽤 많이 탔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저녁 때 공원에 오지 않았으면 아쉬울 뻔했다.
숙소 근처에 공원이 있는건 행운이다.
Kathie
식도락과 예술, 도시에 관심이 많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공간 그 자체에 대한 글을 씁니다. 도시의 자연과 로컬문화를 사랑하므로, 여행에세이보다는 도시에세이를 지향합니다. 여행에세이 <나고야 미술여행>을 썼고, 도시에세이 <나는 아직 도쿄를 모른다>를 연재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