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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연필 Oct 12. 2016

휴식과 여유는 다르다

멈추는 것과 확인하는 것

우리 집 기상시간은 6시였다. 계절이나 학교 등교시간마다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대부분 6시였다. 키가 자라면서 잠도 같이 자랐는지 일어나기가 점점 힘들었다. 그럼에도 아침은 거르지 않고 먹고, 초-중-고 모두 개근상을 받았다. 유독 엄마는 개근상이 가장 큰 상이라며 성실한 학생의 자세를 추구하셨다.


학교에선 친구들과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뛰어노는 일이 가장 즐거웠다. 언제 끝나는지만 중얼거리며 징징거리는 친구들하곤 다르게 나는 학교에서의 시간이 재밌었다. 물론 공부를 안 해서 그럴지도.


학교가 끝나면 곧장 동네 사회복지관 안에 있는 컴퓨터 교실을 갔다. 학교 공부는 싫어도 컴퓨터를 배우는 건 그렇게 재밌었다. dos라는 명령어 형식의 운영체제에서 타자연습으로 친구들과 속도로 경쟁을 하고, 30분이 지나면 주어지는 자유시간. 짧게 하는 게임은 내 생에 최고의 몰입이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면 다시 속셈 학원으로 내려갔다. 컴퓨터학원은 3층, 속셈학원은 2층이었다. 속셈학원에선 공부도 학교에서 하는 공부와는 달랐다. 학교에선 질문에 대해 대답을 못하면 둘 중 하나였다. 여자 선생님이면 플라스틱 투명자로 손바닥을 맞았고, 남자 선생님일 경우 그 거대한 손으로 꿀밤을 맞았다. 기분이 안 좋은 날은 빰을 맞았다. 체육선생님은 납작한 나무 몽둥이를 가지고 다녔고,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속셈학원에서는 폭력이 없었다.

오히려 친구들 스스로가 웃으면서 공부한 적이 많았다. 서로 질문하면서.


속셈이 끝나면 바로 건너편에 태권도장이 있었다.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가장 친한 친구처럼 놀아주는 사부님은 운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가장 무서운 선생님이 되었다. 같이 운동하는 친구들도 마치 기계처럼, ON/OFF 스위치를 작동하 듯, 운동 전 시간과 운동시간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 숨소리 하나 없이 정렬하고 운동 준비를 했다. 초등부가 끝나고 성인부 시간이 되면, 형 누나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너무도 커 보였던 고등학생 형들의 외발턴과, 공주 다움을 버린 걸크러쉬 누나들은 나에겐 너무도 멋있게 보였다.


성인부가 끝나고 집으로 달려가면 밤 10에서 11시 사이가 됐다. 10시에 하는 드라마를 부모님 사이에서 보다가 11시 전에 잠들곤 했다.


힘들다 라는 개념도 없어서인지 반복되는 하루가 매번 기다려지는 시절이었다.








성인이 되고 지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 비슷하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저 즐거울 수 있었던 시기였고 좋았다면서 씁쓸한 웃음을 짓곤 한다. 알고 지낸 사람이 아닌 새로운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대부분 같은 대답과 미소를 보곤 했다.


우리가 성인이 되어 그리워하는 어린 시절은 흘려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부모님의 돈으로 하루가 만들어지고, 친구들과의 노는 시간이 소모되고, 미래를 향한 투자의 이름으로 공부만 하거나, 용돈이나 생활고에 따른 아르바이트도 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자주 쓰는 '생산적인 행동'은 거의 없었다. 다만, 미래에 생산적인 행동을 하기 위한 소모적인 시간이었을 뿐.


그렇게 소모적인 투자를 통해 우리는 여유 '없는' 삶을 얻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벌을 갖고, 일을 하며 돈도 벌고, 어린 시절과 비교도 안될 정도의 자신에 대한 투자를 하고 있는 우리들. 그런 우리들의 삶엔, 있어도 어릴 때 보다 더 있어야만 하는 그 여유는, 찾을 수 없다. 모두의 목표가 '생산적인 행동'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휴식과 여유는 다르다.


휴식에 대한 중요성은 현시대에서 많이 드러나 있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는 것이 그 현상의 하나가 아닐까. 그러나 여유에 대한 인식은 많이 부족하다. 휴식과 여유는 사전적 의미에서의 다름도 다름이지만, 조금 더 쉽게 그리고 깊게 그 다름을 구분해야 한다. 지금 내가 하는 것을 멈추고 쉬는 것과, 지금 내가 왜 이걸 하는지를 확인하는 것.

이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일이나 공부를 하다 잠시 멈추고 심신을 쉬게 하는 것이 휴식이고

일이나 공부를 왜 하는지 생각하고 확인해 보는 것이 여유다.


좋아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조절하는 것이 휴식이고

좋아하는 것을 왜 이루려 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여유다.


휴식도 없는 삶과 교육을 받던 시대는 지나가고, 휴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휴식을 갖는 사람에 대한 좋은 인식이 있는 반면, 아직까진 여유를 가진 사람을 보는 시선 속에 '사치'와 '지나침'이 숨겨져 있다. 이는 여유로운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웃음과 씁쓸함을 보이는 이유는 여유가 부족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 어떤 휴식을 갖더라도 이상하리만큼 충전되지 않는 방전 상태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에게 있어 여유로운 사람이란, 생산적 삶을 버리고 인간의 소모성을 인정한 현명하고 모험적인 사람이다. 어릴 때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라는 걸 버리고 태권도를 같이 했던 누나들처럼.


여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순전히 자기의 몫이다. 어떤 가르침이나 이런 글들로는 이룰 수 없는 것 같다. 이 글의 목적도 '여유로운 사람이 되자' 가 아닌, '여유로운 사람을 지켜보자'에 가깝다.


시간이 지나면 휴식으로 충전되지 않는 나를 확인하게 되고, 필요한 여유를 맞이하게 될 때, 내가 보냈던 사치와 지나침이란 시선이, 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에게 돌아와서 견디기 힘든 좌절을 선물하게 될 수 있다.




소중한 지인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응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냥 지켜봐 주고 믿어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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