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를 제공하다
어릴 적 나의 머릿속에 지도는 '옥수동'이란 동네만이 있었다. 집에서 유치원까지의 길과 유치원에서 집까지의 길. 유치원에서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과 다시 지하철역에서 유치원까지의 길. 집에서 맛의 천국이었던 슈퍼까지의 내리막 길. 맛있는 과자와 함께 다시 집으로 올라가는 오르막 길.
이 길들이 내가 아는 유일한 지도였고, 세상이었다. 집에서 놀이터까지의 길도 있었지만, 모르는 친구들이 말을 거는 것이 무서워 가지 않았다. 나의 놀이터는 대부분 지하철역이었고, 아니면 집에 있던 내 몸보다 큰 갈색 고무대야에 들어가 놀곤 했다.
유치원 때 보다 더 어릴 적에 들은 이야기. 엄마 손을 놓쳐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10미터쯤 가는 바람에 나를 잃어버릴뻔한 그 이야기는 경험담보다는 아는 곳에서만 놀라는 경고 같았다. 어릴 때 두려움이란 나에게 가장 큰 적이자 선생이었다. 그 경고에 순응하여 내가 익힌 길들에서만 놀곤 했다. 엄마가 나를 쉽게 찾을 수 있게.
시간이 지나 지하철역에서 너무 오래 놀았을 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중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갈림길에서 멈추게 됐다. 평소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그 길이 왜 그렇게 궁금했을까. 왜 그렇게 빤히 그 방향을 보고 있었을까. 나름의 계획을 세운 뒤 나는 모험을 시작했다.
계획은 단순했다. 지나가는 옆 건물 하나하나를 꼬박꼬박 신중하게 기억해두는 것. 평소 눈길만 줬던 그 간판들의 글자들을 큰 소리를 내면서 읽고 한 걸음씩 이동했다. 개발 중이던 시기라 부동산이 엄청 많았다. '부동산' 글자는 제외하고 앞의 글자들만 기억했다. 또는 간판 색을 기억했다. 그렇게 계속 직진을 했다가 건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공사 중인 비포장 도로가 등장했다.
신기했다. 다시 옆 건물들을 따라 뒤로 돌아서 집을 가야 했지만, 여기서부터는 직진만 하다가 뒤로 다시 직진만 하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즉, 길이 더 쉬워 보였다. 당시 나에게는 지정된 맵을 벗어나는 행동이었다. 국경을 넘어가는 모험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 날은 분명 너무 오랜 시간 지하철에서 심심함을 달랬기에 앞에 있는 비포장 도로는 호기심 그 이상의 유혹이었다.
계속 전진했다. 오른쪽에는 작은 언덕 위에 나무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왼쪽. 왼쪽은 내가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건물들이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무서웠다. 거대한 하얀 건물이었다.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건물이었다.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언제든지 뒤로 달려갈 준비를 마음속으로 해두고, 하나하나 관찰하고 있었다. 두려움보다 큰 신비함에 매료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냥 멍하니 계속 보기만 했다.
노을과 함께 내 몸이 주황색 빛으로 가득 차는 시간.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달릴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뒤돌아 달렸다. 건물 간판을 기억한 걸 더듬거리며 되돌아갈 줄 알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길처럼 흰자로만 보이는 건물 형태만으로 집으로 계속 달렸다. 집에 도착해서 봤던 엄청 큰 건물을 엄마에게 설명했고, 왜 그렇게 멀리 갔냐는 혼쭐과 그것이 아파트라는 이름을 얻었다.
내 첫 모험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두려움이란 것을 대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에 따라 많은 것들이 설명되는 것 같다. 두려움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다. 우리는 사사로운 두려움부터 내면 깊숙한 두려움까지 누군가와 공유할 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공유한 친구들처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한다.
그만큼 두려움이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생각보다 복잡한 무엇이다. 이 녀석을 어떻게 다루며 살아가는지가 한 사람의 인생의 색을 다르게 한다.
무섭다. 두려움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 감정은 누구나 겪어보았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감정으로 남는다. 그러기에 대부분 그 두려움을 피한다. 또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면 나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이미 두려움을 피하면 큰 변화 없는 '유지'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보여주고 있다. 다치고 싶지 않기에 이런 선택은 매우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것 같다.
무서워도 가보는 사람들이 있다. 또는 어떤 환경이나 시점으로 가보려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두려움을 피하는 사람들보다 다치거나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이 사람들은 움직인다. 다치고 싶지 않은 것이 본능인 것처럼, 아직 다치지 않은 사람들은 그게 뭔지 모르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닐까. 다쳐본 사람이라도 그보다 더 큰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는 경우. 또 그렇게 움직이게 된다.
무서워도 가보는 사람들이 먼저 존재했고, 그로 인한 결과를 통해 무서운 것을 피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결국 우리의 단순한 모험들이 모여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
가족들에게
가족의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친구의 친구들에게
결국,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게
별거 아닌 단순한 모험들이 다른 이들에게 여러 선택지를 제공한다.
나는 무서움을 생각보다 많이 겪었다. 그래서 무서운 건 무섭다. 그 어떤 감정도 무서움을 이긴 적 없는 것 같다. 어릴 적엔 호기심이라는 복병이 가끔 나타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 자주 찾아오진 않는다. 그럼에도 요새는 모험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자꾸 무서운 곳으로 가보려 한다.
나는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치고 싶지 않아도 다치는 세상이다. 이런저런 경험들이 그 다치고 아팠던 기억을 흐리게 해주는 것 같다. 내가 모험을 바라보는 이유가 이런 단순한 이유다.
각자 모험을 선택하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모험을 하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응원한다. 나도 나 자신에게 응원하고 있다. 셀프라 별로 와 닿지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