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하지 않았지만, 모든 말을 해석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 말을 또박또박 잘하는 여자아이가 있었고 나와 짝꿍이 되었다. 어느 날 친구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3,000원짜리 공중전화 카드를 들고 갔었다. 우리 엄마는 그걸 왜 가져가냐고 물어봤지만, 그냥 공중전화를 써보고 싶다는 말에 엄마는 자기가 쓰던 전화카드를 줬다. 친구들은 자기 엄마 아빠도 이거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내 곁에서 이리저리 만지며 구경을 했다. 막상 어른들만 가지고 다니는 것인데 친구가 가지고 있어서 신기한 마음으로.
이 날, 공중전화카드 때문에 나는 짝꿍에게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화내지 못한 내가 억울했다. 친구들의 관심이 모두 끝났을 때, 잠깐 구경해도 되냐고 물어본 짝꿍에게 순순히 카드를 건넸다. 그리고 잠깐 구경을 했고 짝꿍은 바로 나한테 돌려줬다. 그리고 난 책상 서랍에 넣어뒀다. 시간이 지나고 카드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얼굴과 몸이 전부 달아오르고 사색이 되어버렸다. 옆에 있던 짝꿍은 칠칠치 못하게 그걸 잃어버렸냐며 잘 찾아보라고 했고 나는 달콤한 쉬는 시간 10분을 다 소비했다. 수업 종이 치고 다음 쉬는 시간에 어디부터 찾아야 하지? 엄마한테는 뭐라고 해야 하지? 누가 가져간 거지? 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짝꿍의 한마디가 내 모든 생각과 불안을 잠시 멈췄다.
"내가 찾아주면, 그 카드 나한테 줄래?"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잠시 생각하게 됐던 순간. 분명 범인이 짝꿍이라는 확신이 생겼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짝꿍만 바라봤다. 그리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짜인 각본처럼 이리저리 찾는 행동을 하더니 짝꿍의 책 사이에서 그 카드가 나타났다. 그리고 당당하게 나한테 말했다.
"이제 이 카드 내 거다"
나는 바로 "이거 너가 가져간 거잖아. 내놔" 하며 뺐으려 했지만, 짝꿍은 재빠르게 카드 든 손을 뒤로 피하면서 말했다.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너는 내가 가져간 증거도 없이 찾아준 친구를 의심했고, 너 입으로 찾아주면 나한테 준다고 약속했다는 것을. 나는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는데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얼굴만 빨개진 채. 그건 짝꿍의 말이 맞아서가 아니라 반박할 수 있는 내 머릿속 사실들이 정리가 되지 않았고, 짝꿍의 처음 보는 치밀하고 나쁜 모습의 충격 때문이었다. 이후 끈질기게 내놓으라는 반복 표현으로 다시 회수하긴 했지만, 아직도 그때 그 답답함은 기억할 수 있다.
입은 움직이지 않고 머리 속에서 말하는 것. 이게 생각일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기억은 보이는 것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 내가 나에게 말한 생각들이 먼저 기억이 난다. 그 후에 보이는 것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은 더 자세하게 기억하는 것도 그 생각과 연결이 되어서가 아닐까 예상해본다.
짝꿍의 공중전화카드 도난 사건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추리할 때 나오는 흔한 상황.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흩어진 감정과 단어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해줬던 아픈 기억이다. 나에게 하는 말이 너무 많았던 어린 나는, 이 사건 이후부터 생각을 정리하는 연습을 했고, 입으로 표현하는 연습을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대화는 어렵다. 어떤 사건들이 쌓여갈수록, 우리는 자신만의 특성을 가진 필터를 의도하지 않게 얻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말을 건네 오면 그 필터는 역시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해석에 들어간다. 건네받은 말의 뜻을 알면서도 다른 의미를 얻으려 한다. 그리고 이 필터는 말하는 영역까지 조종하게 된다.
대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비즈니스적 대화에서는 이 필터가 유리할 수 있다. 정신적인 힘이 들지만, 실수를 줄이고 신중한 판단을 하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알 수 없는 답답함을 가져다준다. 10분이면 끝날 대화가 시간 단위로 늘어나는 경우도 많다.
그럼 힘들지 않은 대화는 무엇일까?
분명 어렵겠지만,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힘들지 않은 대화가 될까? 특히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의도치 않게 얻은 필터를 잠시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게 옳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건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성인이 되었다면 더욱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 보고 싶다고 말하고
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보고 싶어 하는구나. 그렇게 들어야 하는 연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