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급 인생 Sep 21. 2023

아내와 여행이 즐겁지만은 않다.

지난 7월 아내와 알프스 여행을 다녀왔다.

알프스 여행이라 해서 산을 등반하거나 트래킹을 한 것은 아니다.

편하게 단체 전용버스를 타고 살짝 맛만 보는 패키지여행을 했다.

융프라우가 있는 그린델발트, 마터호른이 있는 체르마트, 그리고 이태리 쪽 알프스 지역인 돌로미티를 다녀왔다.


오래전부터 계획해 두었던 여행지도 아니었다.

여행사 홈페이지를 기웃거리다 나름 가성비가 높다고 판단했던 여행상품골랐을 따름이다.

아내가 올해 환갑이 되어 정년퇴직을 하게 되으니 남편으로서 뭔가 축하해 줄 이벤트가 필요했다.

예전 같으면 가족 친지를 초청해 잔치를 벌였겠지만 100세 시대인 지금이야 누가 그런 행사를 치른단 말인가.

그렇다고 예년의 생일처럼 괜찮은 음식점에서 식사로 때우기 서운할 터였다.

그러니 짧고 싼 유럽여행이지만 아내로선 남들한테 말하기엔 그나마 폼이 날뿐더러 나로서도 뭔가 해줬다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문제는 예년보다 더운 여름 날씨라 연일 보도 되어 좀 선선한 곳으로 가야겠는데 이것저것 따져보니 보통일이 아니었다.

생각 같아선 북유럽이 제격이긴 한데 내 형편을 고려하면 비용이 만만치 않다.

낭만적인 곳으로야 지중해쪽이겠만 펄펄 끓을 게 뻔한 지역을 가자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날며칠 동안 여행사 홈페이지를 이리저리 헤매다 마침내 딱이다 싶은 곳이 알프스 쪽이었다.

큰 산맥 지역이고 고도가 높은 곳이라 그리 덥지 않을 기후일 테니 중년이 다니기수월할 듯했다.

게다가 홈페이지 첫 화면부터 선심 쓰듯 대폭할인된 가격대의 상품이라 뻔쩍거리기에 아내나 나나 맘에 쏙 들었다.


여행사에 예약하고 나서 여행날짜를 기다리는 한 달 남짓 동안 내는 들 있다.

누굴 만나기라도 하면 유럽여행을 간다고 자랑깨나 하고 다는 듯했다.

하긴 코로나 시국으로 거의 3년간 해외여행은 꿈도 못 꿀 상황이었으니 간만의 해외 나들이가 어찌 신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아내와 여행을 할 때면 슬금슬금 스트레스를 받는다.

즐거우려고 떠난 여행이지만 여행이 끝날 무렵이면 마음이 우중충해진다.

이유는 이렇다.



"짐이 너무 많다."


일주일 이상 소요되는 장기여행이 아니라도 대형 캐리어를 가져가야 한다.

아내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다.

남자라면 필요 없는 물품까지 가져가야 하니 이해할 만하다.


화장품을 비롯한 여성용품, 여행스폿마다 맞추어야 하는 다양한 의류, 거기에 어울리는 백이나 신발 등의 소품을 챙기다 보면 아내의 캐리어는 금방 가득 찬다.

거의 연예인 출장 수준이다.

거기다 나나 아내나 현지식에 익숙지 않는 나이니 느글거리는 속을 달랠 컵라면, 햇반, 마른반찬 등을 충분히 챙겨야 한다.

나도 나름대로 필요한 물품 많지만 이럴 지경이 되면 내 옷가지는 최소화해야 한다.


속을 알 턱이 없는 아내는 설상가상 매일 용하는 약이나 비상용품과 귀중품 항시 휴대해야 한다며 별도의 기내용 캐리어를 준비한다.

이쯤 되면 내 기준으로 어딜 가더라도 한 달쯤은 너끈히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짐이다.

아내는 기껏 크로스백을 걸치고 기내용 트렁크만 면 되지만 나는 큰 트렁크 두 개를 여행이 끝날 때까지 열심히 보살펴야 한다.


일 년에 한두 번 떠나는 여행이니 현지에 가서 불편하지 않아야 하고 조금은 멋을 부리고 사치를 해도 좋다는 생각을 나도 못 받아 줄리야 없다.


그렇지만 한 도시에 며칠간을 머무르지 않고 매일 같이 숙소를 옮겨 다녀야 할 때는 정말 고이다.

매일 트렁크 3개를 안전하게 이동 차량에 실어야 할뿐더러 숙소에 도착해서도 배정된 방에 옮겨야 할 사람은 나뿐이지 않겠는가.

더구나 엘리베이터가 없을 땐 무거운 캐리어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계단으로 올라야 하는데 아내더러 그러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유럽처럼 엘리베이터가 협소한 나라에서는 짐이 크고  우리 부부가 항상 나중에 타야 눈치가 안 보인다.

성미가 급한 나로선 2층 정도의 방이 배정되면 아예 계단으로 들고 나르기도 한다.



"화장실 자주 찾는다."


부부간이라도 쑥스러운 일이라 아직 원인을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내는 생리적으로 남들보다 화장실 이용이 잦다.

일상생활에선 불편함이 없는데 여행만 가면 유난히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판단컨대 신체적인 신호보다 심리적인 측면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안 가도 될 상황이지만 혹시 다니다 보면 예기치 않게 다급한 상황에 닥칠 수도 있다는 조바심 때문이라 본다.

모르긴 해도 언젠가 그런 상황에서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생긴 트라우마가 아닐까 추측한다.

다른 일은 몰라도 용변 때문에 곤란한 처지를 당하면 몹시 난처하니 충분히 이해는 간다.


해서 아내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화장실부터 찾는다.

어딜 가나 관광 자체보다 화장실 위치를 알아두는 게 우선이다.

아내의 눈치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되면 나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괜히 긴장한다.

게다가 아내는 꼭 떠날 때쯤 한번 더 갔다 오고, 그러다 보면 일행이 먼저 떠나고 한참이나 지나서 허겁지겁 뒤쫓느라 우리 부부는 식은땀을 흘린다.


이런 형편이니 여행 초기엔 그러려니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심신이 피곤해지면 내 인내심도 슬금슬금 금이 가다가 귀국 무렵에 꼭 한 번씩 버럭 역정을 내게 된다.

기분 좋게 떠났던 여행이 찜찜한 기분으로 변해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무릎상태가 시원찮다."


나이가 60줄에 드니 아내에게도 퇴행성 무릎관절염이 찾아왔다.

아무리 관리를 잘한다 해도 많은 중년 여성이 겪는 노화현상이다.

진작부터 무릎이 시원찮은 줄이야 알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심각해진 줄 몰랐다.


게다가 하체의 혈액순환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한 장거리 비행을 하다 보면 사정은 더 악화된다.

젊은 청춘들도 열댓 시간 넘는 유럽행 비행기를 타고 있으면 다리가 무지하게 저려오는 데 무릎 상태가 좋지 않은 중년여성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럴 때마다 다음번 여행은 여유롭게 자유여행을 하자고 마음 먹지만 막상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을 생각하 속 편한 패기지 여행을 택하곤 한다.


편하자고 택한 패키지여행은 일행과 보조를 맞추어야 해서 우리 부부는 오히려 난감해질 때가 많다.


화장실을 자주 다니느라 일행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는 데다 갈수록 절룩거리는 아내와 함께 나도 재빨리 움직일 수 없다.

우리 사정을 모르는 일행과 인솔자는 하나라도 더 보려고 촉박하게 움직이니 아내가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할 때마다 나는 속이 탄다.

늘 뒤처져 허둥대는 우리 부부는 충분히 관광을 즐길 수 없다.

그나마 자유 시간을 충분히 가질 때면 한숨을 돌리는 형편이다.

이래가지고서야 왜 여행을 다니는지 나도 이해가 안 된다.

행복한 순간의 추억을 만들어야 할 여행이 여행 막바지에 갈수록 짜증이 늘고 왜 여행을 왔는지 후회가 막심하다.


하긴 나도 이럴진대 아내 자신이야 얼마나 속이 타고 미안한 마음이 들겠는가.




긴 비행과 환승대기, 또 긴 비행을 거쳐 도착한 취리히에선 비가 몹시 내렸다.

오랜 비행으로 지친 데다 시차와 거센 비를 맞고 다니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

평소에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을 비축한 나도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고꾸라져 잠든 후 아무 기억이 나 않정도였으니 아내는 오죽하였을까.


다음날 융프라우에 오르기 위해 곤돌라 탑승장까지 가는 길도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30여분 걸어가는 길은 트래킹 하듯 상쾌했지만 무릎이 시원찮은 아내가 자꾸 뒤처졌다.

아니니 다를까 탑승장에 도착했을 땐 더 걷기가 힘들었는지 무릎 보호대를 차야겠다며 화장실로 갔다 왔다.


그 후로 관광지를 옮겨 다닐 때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줄곳 불편한 눈치였다.


그나마 장거리 이동을 할 땐 전용버스를 이용해서 다행이었지만 목적지에 도착해서 가이드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다닐 땐 꽤 힘들어 보였다.

막상 이국적인 풍광과 문화에 빠져있을 땐 통증을 잊은 듯했지만 이동할 땐 슬금슬금 통증을 느꼈을 터이다.


안쓰럽기는 하였지만 단체 여행이니 우리 부부 때문에 지장이 생길까 조심스러웠다.

일정이 빠듯하지는 않은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우리 부부만을 위해서 별도의 시간을 배려해 줄 정도 아니었다.


아내는 무릎이 시원찮은 데다 화장실 문제 있으니 정해진 시간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럴 줄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닥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내를 위한 여행이니 성마른 내 성격을 엄히 다스리느라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속 태움 고개를 넘지 못하고 의도치 않은 역정을 몇 번 분출다.


아내는 아내대로 여행 후반부로 갈수록 심적인 부담감이 커져 간 듯했다.

쇼핑을 즐기는 아내도 이동을 극히 자제하는 눈치였다.

귀국하는 공항이나 환승공항에조차 벤치에 앉아 있을 뿐 기념품을 찾아 돌아다니던 예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귀국 비행기 안에선 장시간 쪼그려 앉아있느라 혈액 순환이 되지 않는지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여행을 하려면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했다.

시간, 돈, 체력.

이 중 한 가지라도 빠진다면 그 여행은 고달프고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참이나 생각했다.

나는 이 세 가지에다 한 가지 더 충족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근래 부쩍 들었다.


퇴직이 코앞인 나는 시간, 돈, 체력은 어느 정도 충족다고 믿는다.

취미가 없는 나는 퇴직 후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다.

나 혼자 보다는 아내와 함께 하고 싶다.

하지만 아내는 력이나 생리적으로 여의치 않아 보인다.

중년이 되니 어쩔 수 없는 노화현상도 찾아온다.


여행을 즐기려면 혼자 세 가지 요건을 갖춘다고 되는 게 아님을 젊을 땐 몰랐다.

나뿐만 아니라 여행 메이트인 아내 역시 저 세 가지를 갖추어야 가능하다.



그렇다고 인생의 낙인 여행을 포기하며 늙어가고 싶지는 않다.


아내의 사정을 생각하면 우린 패키지여행보다 자유여행을 다녀야겠다.

도보 이동이 많은 유럽여행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 휴양을 즐기는 일본이나 동남아 여행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도라는 수수께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