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돈의 기쁨, 마음의 갈등

60대 부부에게 생긴 해외여행 기회에 대하여

by B급 인생

목돈이 생겼다.

재취업을 하고 1년을 성실히 근무한 덕분으로 국가가 지급하는 조기 재취업 수당을 받았다.

규정에 따라, 재취업으로 받지 못한 실업급여의 절반을 한꺼번에 수령했다.

요즘 부정 수급자 문제로 절차가 까다로워졌다고 했다.

나는 현직장의 재직증명서와 근로계약서, 정부의 재취업심사 결과공문을 꼼꼼히 챙겨 제출했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받고 보니 현직장에서 받는 월급의 몇 배나 되는 큰돈이었다.

전 직장과 연결된 마지막 끈이 끊어지는 듯한 묘한 감정이 스쳐갔지만, 오랜만에 받아본 목돈이라 마음만은 넉넉해졌다.




작년 이맘즈음 재취업할 때엔, 1년을 잘 견뎌 이 수당을 받는다면 우선 해외여행 경비로 쓰기로 마음먹었었다.

정년퇴직 후 지방 몇몇 곳을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만 했지 해외여행은 언감생심이었다.

가깝고 저렴한 동남아라면 몰라도, 유럽처럼 장거리 해외여행은 적금이라도 들어야 할 만큼 큰돈이 드니 결심하기 어려웠다.


체력이 하루가 다르게 예전 같지 않다고 생각하니 먼 여행지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이번의 목돈은 예상보다 큰돈이어서 비로소 기회가 온 것 아닌가 싶었다.

36년 직장 생활을 버텨낸 나와 맞벌이 직장생활로 고생한 아내를 위한 보상이라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큰 동서 부부가 언제 해외여행 한번 같이 가자고 아내에게 제안했다고 들었다.

팔순 전후의 두 분도 앞으로 장거리 여행은 힘들지 않겠냐며 이번을 마지막으로 여긴다고 했다.

내 입장에선 욕심만 앞서는 고령의 어른들을 모시고 가는 장거리 여행이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괜한 만용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살아오는 동안 이것저것 신경 써주시고 도움을 주신 부모 같은 분들께 제대로 된 감사의 표현 한번 못했었는데 이번이 기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여행을 가기로 작정하니 마음 한구석에서 슬금슬금 갈등의 싹이 텄다.

앞으론 이런 목돈이 생길 리도 없고, 함부로 쓸 처지가 아니라는 현실 자각이 밀려왔다.

지금 소득으로는 적금을 붓더라도 꽤 오랜 기간이 걸릴 듯한데, 짧은 호사를 누리기 위해 적지 않은 목돈을 가볍게 써버리는 것 아닐까 망설여졌다.

마음속 검열관이 나타나 무언가 더 알차고 보람된 일에 보태야 하지 않는지 질책하는 듯했다.


무엇보다 요양원에 계신 부모님이 밟혔다.

모처럼 생긴 목돈을 여행경비로 충당하는 게 온당한지 묘한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두 분께 드는 비용을 형편이 여의치 않은 형님, 누님들과 분담하고 있던 터라 마음이 더 무거웠다.

기력이 하루가 다르게 쇠해가시는 마당에, 멀리 떠나 있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엄습했다.



얼마 전부터 아버지의 입맛이 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불안감은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요양보호사를 통해 큰누님에게 전달된 아버지의 요구사항이 까다로웠다.

입맛이 없어 밥을 못 먹겠으니 이러저러한 반찬을 만들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누님이 보내온 사진을 보니 아버지의 얼굴이 핼쑥해지셨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셨는지 볼살이 움푹하고 생기도 눈에 띄게 떨어져 보였다.

그러지 않아도 얼마 전에 심한 감기몸살로 입원치료를 받으셨다.


며칠 전 신문기사에 노인의 입맛이 달라지면 치매를 의심해봐야 한다는 내용을 읽었다.

입맛이 달라졌다는 것은 미각을 담당하는 뇌기능의 쇠퇴를 의미한다고 했다.

구순을 훌쩍 넘기시고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에게 치매가 닥친다고 일상생활이 새삼스러울 리도 없다.

하지만 이런저런 작은 변화가 가리키는 것은 짐작이 되었다.

아버지에겐 삶의 불꽃이 흐릿해지고 있다는 뜻으로 읽혔다.




여행계약을 하던 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부모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형님과 누님들이 눈에 선했다.

그들도 60대 후반의 노인이 되었지만 그 흔한 해외 구경도 마음 편히 못한 형편이었다.


부모님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불안했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올 동안 제발 아무 일이 없으면 하는 이기심이 앞섰다.

출발예정일까지 많이 남았으니 차라리 그사이에 발이 묶일 불가피한 핑계라도 생겼으면 싶었다.


한편으로, 큰 동서 부부와 이미 약속이 되었고 아내도 오랜만에 떠나는 해외여행에 들떠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부부도 60대 한복판에 들어섰으니 체력으로나 비용으로나 어쩌면 남은 인생의 흔치 않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포기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다.


이미 여행계약은 맺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갈팡질팡한다.

부모님과 형님, 누님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다가도 우리 부부의 여행에 차질을 걱정하는 마음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이런 양가의 마음 자체가 자식으로서 형제로서 도리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세대가 짊어진 삶의 양면성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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