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를 읽고
요즘 나이 듦, 노화, 죽음과 삶에 관한 책들에게 마음이 간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의 하나일 게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를 읽었다.
근사한 제목에 이끌려 목차조차 보지 않고 골랐다.
문장들이 무겁지 않아 이삼일이면 될 줄 알았는데, 읽는 내내 행간의 의미가 가볍지 않아 꽤 오래 읽었다.
급격히 늘어난 기대 수명과 함께 따라온 제2의 삶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를 다룬 철학적 에세이이다.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히 시인하면서도 그 안에서 새로운 자유를 발굴해 내려고 한다.
단순히 건강하게 오래 살자고 부르짖는 통속 자기 계발서와 다르다.
누구나 웅얼거릴 뿐 내면에서만 맴돌던 생각들을 표현해 내는 통찰이 날카롭다.
내 딴에 의미 있다고 여기는 부분을 뽑아봤다.
사실, 나이는 우리가 비교적 기꺼이 따르는 협약이다. 이 협약이 사람들을 이런저런 역할과 입장으로 갈라놓았는데 과학의 발달과 수명의 연장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지금은 속박에서 벗어나 성숙과 노년 사이의 모라토리엄을 잘 활용하여 새로운 삶의 기술을 만들어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 모라토리엄을 인생의 인디언 서머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16쪽)
요즘 70대라도 면전에서 노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법적으로 65세가 되면 노인으로 규정하지만, 일상에서 노인으로 대접했다가는 무슨 험한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이제 환갑이 되어도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는커녕, 앞 세대의 동년배와 달리 몸은 여전히 장년이다.
자신의 신체나이를 전 세대와 비교하는 계산식이 있다.
지금 나이에 0.8을 곱하면 현재 자신의 신체와 맞먹는 전 세대 나이라고들 한다.
이 계산대로라면 우리 신체는, 60세가 되어도 부모 세대의 40대 후반과 유사하고, 8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예전의 환갑 언저리에 닿게 된다.
의학의 힘으로 20년이라는 인생의 인디언 서머가 생겼다.
기본적으로 인생이 길어졌다. 기 드 모파상의 비유를 인용하자면 인생은 기차처럼 홱 지나가는 것이었는데,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인생이 무거운 권태와 쫓기는 듯한 속도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니 너무 짧아진 동시에 너무 길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생은 죽죽 늘어져 끝나지 않을 것 같다가 꿈처럼 홀연히 사라진다. (20쪽)
더 젊었을 땐 해가 바뀔 즈음이면 늘 한두 가지 다짐을 하거나 계획을 세워두곤 했다.
뭔가를 배워야지, 어디를 다녀와야지, 이젠 하지 말아야지...
올해는 해가 바뀌고 한 달이 지나도록 새롭게 뭘 하고 싶은 욕망이나 하지 말아야 할 각오가 생기지 않는다.
해가 바뀌어도 큰 의미가 생기지 않고 날마다 그날이 그날인 것이다.
12월 31일이나 1월 1일이나 뭐가 다른단 말인가 싶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이 어김없이 반복과 순환을 거듭한다.
이 권태를 어찌할 것인가?
지루함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정작 달력의 숫자는 무서운 속도로 지워져 간다.
돌아보면 시간은 늘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뭘 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데 한 주가, 한 달이 속절없이 스쳐갔다.
내 나이 60대이니 내 삶의 속도는 그야말로 시속 60Km대를 넘나드는 듯하다.
오늘도 숨 가쁜 질주와 지루한 권태 사이를 진자처럼 오가는 신세다.
결국, 까놓고 보면 사기다. 과학기술이 늘려준 것은 수명이 아니라 노년이다. 죽기 직전까지 우리를 쌩쌩한 30대, 40대의 외모와 건강 상태로 살게 해 준다면, 혹은 우리가 선택한 연령대로 살아가게 해 준다면, 그게 진짜 기적일 것이다. '수면 연장 기술'이 세포 및 미토콘드리아 관련 요법, 수술, 연구를 통해 그러한 방향으로 매진하고 있다지만 아직 먼 얘기다.
이 안식년은 독이 든 선물이다. 오래 사는 만큼 병도 오래 앓는다. 건강한 상태에서의 생존 기간은 그렇게까지 늘어나지 않았다. 의학은 장애와 치매를 만들어내는 기계가 되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삶을 20년이나 더 살라니!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얼굴을 유지하거나 수술 한 번으로 뚝딱 되찾고 싶다. 노년은 신체와 정신이 그럭저럭 괜찮다는 조건에서만 참을 만하다.(30쪽)
아침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추운 겨울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요즘은 온기 가득한 이불속에서 오분만 더, 일분 더 하면서 미적거린다.
언제부턴가 아침에 눈을 떠도 개운치 않다.
20년 넘게 해 오던 근력운동을 점차 줄여 이제 한 주에 두어 번만 하는데도 온몸이 천근만근이다.
웬만해선 입밖에 내지 않던 말이 자연스레 나온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
TV 건강 프로그램을 만나면 유심히 들여다보곤 한다.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젊음은 사라지고 수명만 늘어났다.
인생의 인디언 서머도 건강해야 누릴 수 있는 행운이다.
우리 삶은 소설이 아니요, 늘 그날이 그날 같다. 일상에는 기억할 만한 일화가 별로 없다. 매일매일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삶에는 사건이 점점 빈곤해진다. 뭐 새로운 것이 없나? 이 물음에는 늘 똑같은 대답이 튀어나온다. 별일 없이 사는 거지, 뭐.
그런데 인간은 일화 형식의 일상을 소재 삼아, 그 소재가 아무리 하찮을지라도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살아간다. 평범함의 과제는 폭풍 같지 않은 폭풍의 일상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시시해 보이는 폭풍이 계속 이어지면 가장 강인한 마음도 무너뜨릴 수 있다.(72~73쪽)
처음엔 문장마다 냉소적인 마음이 앞섰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싶었다.
의욕은 줄고 체력은 달리는 현실에서 보람된 하루란 사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집 밖을 나서면 뭐든지 돈도 든다.
나이 들어 나를 움츠러들게 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젊은 날엔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로부터 하나둘씩 뒷걸음질 쳐야 하는 현실이 닥쳤다.
세상은 저만치 앞서 달려가는데, 그저 뒷모습만 바라보는 듯하다.
하지만 저자는 끈질기게 나를 설득한다.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삶의 부조리를 그저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우리의 삶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라는 듯 속삭인다.
하루하루가 완전한 인간 극장이다. 하루는 삶을 잘라내 보여주는 상징체계다. 눈부신 새벽, 의기양양한 정오, 수고로운 오후, 차분한 황혼을 보라.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일상의 죽음에서 벗어나는 작은 부활이다. 아침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밤이 앗아간 기운을 돌려받는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자연은 여전히 우리 삶의 리듬을 구획 짓는다. 날씨가 화창하고 흐리고에 따라서 기분이 널뛰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식으로 대우주와 우리 인간이라는 소우주는 연결된다.(78쪽)
삶에 대한 열의와 피로가 매일 아침 내 머리맡에서 싸움을 벌인다.
저자는 이 지루한 싸움을 멈추려 하기보다 그저 선물처럼 받아들이라고 나를 설득한다.
포기하지 말라고.
큰 것을 바라지 말고 작은 것에서 희열과 기쁨을 찾아보라고 한다.
그러면 속도와 권태를 오가며 좌절하고 낙담하는 기분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듯이.
50세, 60세, 70세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20세, 30세, 40세 때와 똑같다. 삶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 달고, 저주를 퍼붓는 자에게 매섭게 군다.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고, 어느 날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다. 어느 나이에나 삶은 열의와 피로의 싸움이다. 인생사는 그저 부조리하고도 멋진 선물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어딘지 모를 곳에 와서
누구인지 모를 자로 살며
언제인지 모를 때 죽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가는데도
나 이토록 즐거우니 놀랍지 않은가
-마르티누스 폰 비버라흐(16세기 독일의 성직자)(96~97쪽)
너무 많은 기대를 걸지도, 지레 겁먹어 걱정하지도 않기로 하자.
인생은 본래 어떤 정답도, 정해진 각본도 없는 부조리한 무대일 뿐이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애쓴 만큼의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고 삶을 원망할 필요는 없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걷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에는 정중히 고개를 돌리며 살면 그만이다.
그렇게 삶의 무게를 덜어내며 흐르다 보면, 언젠가 집착을 놓아버린 선인이나 초인의 평온함에 나도 모르게 닿아 있지 않을까.
영국의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는 "인생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마지막 날까지도 연습중일 테고, 서툴게 한 음 한 음 연주해 낼 것이다. 몸이 불편한 자, 병든 자, 다친 자, 아픈 자 어리석은 늙은이에게 위대한 미래가 있을진저.(120쪽)
요즘 매일 하는 일 중에 하나가 햇빛 쪼이기다.
나이가 들면 매일 잠깐이라도 햇빛을 쪼이라고 한다.
햇볕은 노년의 뼈와 잠을 붙들어주는 가장 저렴하고도 귀한 처방이다.
추운 겨울에는 꽁꽁 싸매고 다니니 문제다.
마스크와 목도리 사이로 간신히 드러난 얼굴만이 햇살을 받아들일 뿐이다.
더구나 꼭 필요하지 않으면 외출도 하지 않으니 집안에서 고립을 자초한다.
세상이 어느 정도 달궈진 오전 한 때, 남쪽으로 난 창을 열고 겨울 햇살 아래 반라의 몸이 된다.
찬 바람이 살짝 스치지만, 햇살은 살갗을 부드럽게 꼬집으며 안온한 온기로 나를 감싼다.
노천탕 온천수에 온몸을 담가놓은 듯하다.
바리스타 강좌를 통해 배운 대로 직접 내린 커피도 한 잔 곁들인다.
커피 향기가 더해지면 세상의 소음은 저 멀리 물러난다.
생각도 사라진다.
뭔가를 해야 하루가 보람찬 것처럼 여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불안했다.
오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그저 그런 날이 지나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내가 바라던 삶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제 어렴풋이 깨달아 간다.
무언가를 채우려 애쓰지 않아도, 흐르는 세월에 그저 몸을 맡긴 채 햇살을 받아들이는 이 적요한 순간처럼 '내 인생의 인디언 서머'를 살아내면 된다는 것을.
※ 인디언 서머는 기상학에서 가을철 서리가 내린 뒤, 겨울이 오기 직전 갑자기 여름처럼 따뜻하고 맑은 날이 이어지는 기간을 말한다. 북미와 유럽 기준으로 대략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나타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