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은 인자하지 않아 만물을 제사상의 풀강아지(芻狗)처럼 여긴다.
제사가 끝나면 미련 없이 버려지는 풀강아지처럼, 천지는 만물을 지극히 무심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노자의 이 서늘한 통찰은, 의미를 찾으려 아등바등하는 인간의 고통이 실은 자초한 것임을 꾸짖는 듯하다.
먼 옛날 인류의 선조들은 세상이 흘러가는 바에 맞추어 아무런 자각 없이 살아갔을지 모른다.
시간이라는 개념도 없이 한없이 반복하는 낮과 밤의 교대와 계절의 순환에만 맞추어 하루하루를 흘려보내지 않았을까?
세월은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스쳐갔고 삶은 마치 소용돌이처럼 덧없이 맴돌았으리라 짐작한다.
어느 시점부터 인류는 이 끝없는 흐름과 순환에 권태를 느꼈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면 이런 삶도 기꺼이 받아들였겠지만, 인간이기에 그 흐름과 순환 속에서 나만의 좌표를 찍고 삶의 형체를 구현하고 싶었을 터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우리가 시간을 달과 해로 나눈 이유는 세월의 무미건조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디'를 만든 것이라고.
생이 짧았던 인류의 선조 누군가는 몇 년을 살더라도 의미 있게 보내고자 했을 것이다.
삶을 군데군데 잘라 가끔은 분위기의 전환을 해보고 싶지 않았을까?
그 잘린 부위에 마디가 맺혔고, 막연하게 흘러가는 흐름에 시간이라는 관념이 새겨졌지 싶다.
노자가 갈파했듯 세상은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갔지만, 의도적으로 시간의 마디를 만들었고 어제까지 삶의 종결이자 새로운 삶의 출발을 상징하는 이정표로 삼았다.
그 이정표에 서서 지금 어느 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확인도 했을 거라 상상한다.
마디마디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향해 가면서 지루하고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텨냈을 것이다.
선조들이 창조한 시간의 마디를 의식할 겨를도 없이 내 삶의 시간들이 휙 하고 지나간다.
퇴직 후 일 년, 무엇을 하며 채웠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디가 사라진 의미 없는 시간은 매듭 풀린 실타래처럼 무력하게 흘러간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룬다고 큰일이 나지 않는 일상이다.
출퇴근의 고단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 밤낮을 바꾸어 산들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다.
오늘이 일요일인지 월요일인지도 가끔 헷갈릴 때도 있다.
꽃이 피고 낙엽이 지는 계절의 변화는 보면서도, 내 삶이 지금 어느 좌표를 통과하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은 점차 마모되어 간다.
시간의 마디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니 거기에 맞춰 의미 있게 살려는 긴장감도 희미해지고 있다.
그런들 무슨 상관이랴 싶기도 하다.
문득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걱정된다.
카뮈를 떠올린다.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세계는 그 물음에 침묵한다고 단정한다.
이 무심한 침묵과 인간의 갈망 사이의 괴리가 바로 '삶의 부조리'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늘 불안해한다.
그 무심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치열하게 살라고 한다.
매 순간을 뜨겁게 살아내는 반항의 축제를 벌이라고 한다.
까마득한 옛날에 노자가 갈파했듯 세상은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대할 뿐인데, 우리는 여전히 오늘 하루가 의미 있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있다.
세상은 내 삶과 무관하게 흘러갈 뿐이니 그 집착의 관념을 버리라고 한다.
이렇듯 노자가 말한 대로 무위(無爲)의 삶을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무위의 삶과 카뮈가 말한 반항의 축제 사이에서 나는 늘 방황한다.
나는 그 어디쯤에서, 오늘도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숙명을 응시한다.
60을 넘기면 세상을 보는 눈이 원숙해지고 마음이 평온해질 줄 알았다.
욕심도 줄어들고 앞일에 대한 걱정과 기대도 하지 않을 거라 상상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압박이 나를 짓누른다.
세상이 나를 무심히 대하듯, 나 또한 나 자신을 무심히 대할 수는 없는 걸까?
세상은 여전히 나를 풀강아지처럼 대하니, 오늘 이 순간 바위를 밀어 올릴 의지는 자꾸만 꺾인다.
어쩌면 내가 찾는 '의미' 또한 이제는 버려야 할 마지막 풀강아지(芻狗)인지 모른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아무런 수식 없는 고요한 시간의 마디 위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