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이 줄어드니 책 사보는 비용도 조금 부담스럽다.
다행히 요즘은 여기저기 공공도서관이 많아졌다.
꼭 갖고 싶은 책이 아니라면 집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는다.
작은 도서관이라 소장한 책은 많지 않지만, 상호대차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아쉬울 게 없다.
구 관할의 도서관중에서 아무 데서나 온라인으로 대출 신청을 하면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져다준다.
게다가 곳곳에 무인 대출반납기가 설치돼 있어서 도서관까지 직접 가는 수고도 덜어준다.
참 좋아진 세상이다.
기다리던 책을 받으면 궁금했던 세상살이의 이치나 또 다른 삶의 모습을 마주할 기대에 기분이 상기된다.
그래서인지 새로 빌린 책을 펼치기 전에 나는 뜸을 많이 들인다.
대단한 통과의례는 아니고 오롯이 책에 집중하기 위해서 미리 해두는 준비체조 같은 행위다.
마음을 가다듬는다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
요의가 느껴지지 않아도 화장실을 다녀오고 혹시 손이 갈까 핸드폰도 멀치감치 둔다.
빛이 잘 드는 방향에 맞춰 독서대도 적당한 경사로 맞춰둔다.
메모지와 볼펜도 옆에 두고, 위치 표시용 포스트 잇도 가져다 놓는다.
그밖에 책을 읽는 도중에 발생할지 모르는 일들을 미리 해둔다.
그러다 보면 책을 빌려오고 나서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다.
어떤 땐 그날은 읽지 못한다.
뭔지 모르게 확 달려들지 못하고 미적거린다.
마치 먹고 싶던 과자를 얻게 되면 헐레벌떡 먹어치우기 아까워 잠시 망설이는 아이의 심정이랄까.
이래저래 꾸물대다 마침내 책을 펼쳐 머리말을 읽고 차례를 훑어본다.
한참 동안 서먹서먹하다.
도입단계라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어느 시점에선가 저자의 의도가 서서히 마음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하고, 마침내 나와 책이 혼연 일체가 된다.
궁합이 잘 맞는 책이라면 그 시점이 빨리 찾아오고 다소 낯선 책이라면 조금 늦다.
혼곤한 무아지경의 상태는 노안이 따끔거리거나 엉덩이가 저려 오지 않는다면 꽤 오래 지속된다.
그런데, 가끔 이런 분위기가 깨지고 맥이 잘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한창 진지하게 한쪽 한쪽 넘기는데, 느닷없이 굵게 밑줄을 쫘악 그어놓은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꿈에서 화들짝 깨듯 정신이 확 든다.
머릿속에 유연하게 헤엄치던 논리와 개념의 흐름이 툭 끊어진다.
애써 외면하며 계속 읽어나가지만 울퉁불퉁 그으진 선이 당최 눈에서 벗어나질 않고 주의를 산만하게 만든다.
내 의지와는 달리 뱀 같은 선이 내 눈길을 자꾸 유혹한다.
책 읽는 맛이 확 달아난다.
어느 순간부터 슬슬 부아가 난다.
마침내 책을 덮고 나중을 기약하지만, 다시 책을 펼치면 밑줄부터 눈에 들어와 읽을 기분이 안 든다.
너무 예민해서인가 싶어 몇 차례나 무시하려 노력해 봤지만 허사다.
해서,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미리 이런 상태인지 확인해서 대출할지 결정하는 버릇이 오래전에 생겼다.
요즘처럼 자동대출반납기를 이용하다 보면 책 속의 상황을 미리 살펴볼 수 없기에 난감하다.
도서관에 직접 가는 수밖에 없다.
도서관의 책을 자기 소유인양 읽고 반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반대로 내 책이 아니니 아무렇게나 읽고 반납하면 그만이라 여기는 사람 일 수도 있다.
마치 개인 학습하듯 나름 의미 있다고 여기는 문장에 밑줄을 좍좍 그어 놓았다.
심지어 훼손하거나 오물을 묻혀놓은 책도 더러 보았다.
신경이 예민한 나로서는 그런 책을 만나면 독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기는커녕 문장도 이해할 수가 없다.
많은 잠재적 독자가 읽어야 할 책이니 최대한 깨끗하게 읽은 후 온전하게 반납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다.
꼭 밑줄을 긋거나 표식을 하면서 읽어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다면 직접 책을 구입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낸 세금으로 구입한 공동의 책이며 오랫동안 여러 사람이 읽어야 할 책에다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우리 모두 먹고살기 바빠 교양 있거나 품격 있는 행태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내로라하는 경제대국에다 K-컬처로 압축되는 문화강국이 된 우리나라 국민이 이런 짓을 저지른다니 안타깝다.
애써 도서관을 찾아 책을 읽을 정도면 꽤나 교양 있거나 지식에 대한 욕구가 큰 사람일 터이다.
문화유산에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 이름을 새겨놓은 행위에 비견한다면 지나칠까?
공공의 장소 아무 데서나 용변을 보거나 고성방가를 지르면 어떨까?
행정학이나 정책학에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을 공동 소유의 토지가 개개인의 합리적인 이익 추구 때문에 훼손되거나 황폐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중세 유럽의 어느 마을에 누구나 소를 방목할 수 있는 공동 소유의 목초지가 있었다.
주민 각자가 목초지의 수용능력을 넘지 않을 만큼만 소를 방목해야 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소를 풀어놓았다.
그러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많은 소를 방목하려 들었고, 마침내 목초지의 수용 능력을 초과하기에 이르렀다.
소가 먹어치운 풀이 다시 싹이 트고 충분히 자라는 순환을 못하면서 목초지는 제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목초지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지만(비배제성), 어느 누군가 이용할 때 다른 누군가는 이용할 수 없는(경합성) 유한한 자원이라는 걸 무시한 결과다.
주민 개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이 오히려 마을 전체의 파국적인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이 개념에서 표현한 '합리적' 선택을 나는 이기심이라 바꾸어 표현하고 싶다.
합리적 생각을 했다면 어찌 공동체에 닺칠 비극을 미리 우려하지 않았겠나?
남의 불행을 나몰라라하면서 자신의 이익만 좇는 행태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어쨌던, 천연자원의 고갈이나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같은 공공재의 문제를 경고하는 논리가 바로 이 개념이다.
우리 실생활에서도 쉽게 경험할 수 있다.
공원 같은 공공장소에 설치된 공중 화장실이나 공공 기물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용자가 무분별하게 사용하거나 함부로 훼손하는 사례가 있다.
그 결과 관리가 어려워지고 유지 비용도 높아져 시설의 질이 저하된다.
도로도 마찬가지다.
개개인은 대중교통보다 자가용 이용이 편리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면 교통 체증이 발생한다.
결국 국가 전체의 사회적 비용이 상승하고 우리가 내는 세금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게 싫으면 불편하게 살 수밖에 없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피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개인에게 공유지의 소유권 넘기고 이용자에게 비용을 부담시키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가 강력하게 규제하여 수용범위를 넘어서는 과도한 사용을 억제하라고 한다.
동네 도서관에서 책 한 권 빌리는 데까지 그렇게 규제한다면 분명 반대 여론이 들끓을게 뻔하다.
나도 그렇게 까지 주장하고 싶지 않다.
다만 책을 빌려볼 땐 남을 위해 조금만 배려하고 주의한다면 누구나 기분 좋게 이용하고 우리의 세금도 아낄 수 있다.
꼭 다시 찾아보고 싶은 문장이 있으면 포스트잇을 붙여 놓고 나중에 필사노트에 옮겨 놓길 권한다.
아니면 직접 책을 사서 감명 깊은 문장에 마음껏 표시도 하고 귀퉁이에 자기 소견을 메모도 하면서 농도 있게 읽기를 바란다.
요즘은 스마트폰의 카메라 성능도 좋으니 기억하고 싶은 부분을 사진으로 남겨도 좋겠다.
카메라의 편집 기능도 다양하니 자신의 취향에 맞게 바꿀 수도 있다.
책값이 부족해서든 아니면 내용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서던 여러 가지 이유로 공공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과도한 제한을 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정부는 국민 모두가 맘껏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도서관과 소장 도서를 더 늘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책을 보석처럼 아껴 읽는 것은 교양인으로서 지켜야 할 우리 자신의 몫이다.
자기가 산 책이라도 두고두고 보기 위해 점 하나 찍지 않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어떤 유명 인사는 같은 책을 두권 사서 한 권은 표기나 메모용으로 사용한다고 들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깨끗하게만 읽고 반납하길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