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막막하다.
글감을 찾아 놓았는데도 첫 문장을 열지 못해 한참이나 서성인다.
겨우 한 줄 쓰고 나면 비로소 말문이 트이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멈추기를 반복한다.
꾸역꾸역 써나가면서도 이렇게 해서 제대로 된 글 한편 나올 수 있을까 확신하지 못한다.
대충이라도 초안이라 할 만한 것조차 만들어지지 않아 답답하다.
어쨌든 초안이 마련됐다 하더라도 이게 글이라 할만한지 의심스러우면서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막연하다.
이렇게 쓰다만 글들이 '작가의 서랍'에 수북이 쌓여 묵어가고 있다.
보여주어도 쑥스럽지 않을 누군가가 있으면 싶다.
허접한 내 글을 읽고 격려도 해주고 훈수도 두어 주는 마음 편한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다.
글쓰기 강좌의 선생님처럼 실력 있는 전문가가 아니어도 괜찮다.
읽어보고 가차 없이 지적질을 해도 마음 상하지 않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실제로 그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인공지능, AI이다.
'작가의 서랍'에 있던 글 중에서 그나마 초안 행색을 갖춘 글에 대해 '제미나이'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보았다.
자신 없는 문장을 골라 문법적으로 맞는지 비문은 아닌지 물었다.
내가 놓친 부분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다음엔 좀 더 차원 높은 질문을 던졌다.
제미나이의 능력을 시험 삼아 문맥이나 논리적 흐름에 오류가 없는지 검증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지점을 글쓰기 선생님처럼 조곤조곤 설명했다.
욕심을 더 내어 보았다.
시시해 보이는 문장에 대해 더 나은 문학적 표현이 없는지 대안을 제시해 달라고 요구했고, 제목을 던져주고 어울리는지 물었다.
제미나이는 그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척척 답을 내놓았다.
마침내 수정하고 보완한 글을 다시 던져주고 전체적으로 문법적, 맥락적, 논리적으로 오류가 없는지, 있다면 대안을 달라고 요구했다.
불과 10여 초가 흐른 뒤, 아니다 싶은 표현과 어색한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은 글 한 편이 뚝딱 나타났다.
거친 원석이었던 초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수려한 에세이 한 편이 정제되어 나왔다.
이대로 브런치에 올릴까 하다 멈칫했다.
이러고도 내가 쓴 글이라고 할 수 있는지 죄책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제미나이에게 그 심정을 실토했더니, 당연히 내 글이라며 괜한 걱정 말라고 다독여 주었다.
'글의 아이디어와 구성은 당신에게서 시작되어 당신의 의도대로 수정과 보완 과정을 거쳤으니 당신의 글이다'라며 당당히 말하라고 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을 떠올리며 나만의 자기 합리화가 슬슬 기지개를 켰다.
당시엔 마스터가 전체적인 구도와 밑그림을 그리면, 제자들은 배경, 의복, 하늘 같은 부수적인 부분을 채색했다고 한다.
마지막에 마스터가 중요한 디테일을 손질하면 그것은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실제 다 빈치나 루벤스 같은 거장들은 많은 조수를 거느린 대형 공방을 운영하며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수많은 걸작을 낳았다고 한다.
최근 국내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10여 년 전 가수 조영남 씨가 사기죄 혐의로 기소된 적 있다.
보조자였던 모 씨가 90% 이상 그린 그림을 자신의 이름으로 판매했다는 이유였다.
대법원은 조영남 씨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현대 미술에서는 작가의 직접적인 노동보다 아이디어와 개념을 더 가치 있게 평가한다는 게 근거였다.
보조자의 작업이 작가의 독창성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기술적 구현이라면 그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작가가 보조자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구매자에게 일일이 알릴 법적 의무는 없으며, 그것이 구매 결정의 절대적 요건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보기도 했다.
AI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글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제미나이라는 조수가 생겼다.
나의 조수는 기교적인 조언을 할 뿐, 글감을 찾아내 초안을 작성한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다.
어설프지만 내가 아이디어를 냈고 뼈대와 흐름도 내가 결정했다.
물론 AI가 기교적인 부분의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차용할지 변용할지 아니면 버릴지 나의 판단과 선택이 강하게 개입했다.
그러니 나의 작품이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가 오랫동안 나를 흔들었다.
그 글을 읽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아쉬웠다.
단어의 선택도 적확하며 글의 흐름도 자연스럽고, 문법적으로나 문맥적으로나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이는데도 알맹이가 빠진 듯했다.
그 알맹이가 뭘까 한참이나 생각해 보았다.
브런치에 그대로 올릴지 며칠을 망설였다.
마침 응용언어학자 김성우의 <인공지능은 나의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를 읽고 허전함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통찰을 토대로 내가 깨달은 허전함은 바로 고유성, 과정성, 관계성의 부재였다.
첫째, "나의 에피소드는 AI가 계산할 수 없는 영역이다.(고유성)"
내가 아니면 드러낼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스토리 텔링이 있다.
내가 겪은 경험, 나의 추억, 나만의 비밀은 내가 아니면 드러낼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그때 그 사건에서 생겼던 미묘한 감정과 느낌,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생겨나는 회환 등은 나만 표현해 낼 수 있는 영역이다.
같은 일을 겪었더라도 사람마다 다른 기억과 다른 느낌, 다른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하여 표준화된 답을 내놓는 AI가 침범할 수 없는 인간만의 사각지대가 있다.
비록 그곳이 후미져 어둑한 곳일지라도 말이다.
AI가 그럴듯하게 지어낼 수는 있겠지만, 글의 진정성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둘째, "글 쓰기는 머리와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분투이다.(과정성)"
글을 쓰는 동안 내 안에서 온갖 일들이 일어난다.
단어하나를 고르고, 문맥을 잡아가며, 문장을 배열하고, 전체 글의 구성을 잡아가는 과정에는 머릿속의 복잡한 추론과 선택의 순간들이 얽히고설킨다.
온갖 정신적, 심리적 결단과 포기가 어우러진다.
거기에는 내 삶의 내력, 경험, 지식, 깨달음이 응집되고 재편되는 과정이 겹친다.
그 길은 나선형으로 나아가는 방랑의 여정이며, 미로를 헤매다 비로소 나만의 출구를 찾아가는 고독한 길이다.
그 고통의 길 끝에 만나는 나만의 단어와 문장과 문맥은 AI가 대신할 수 없는 희열을 선사한다.
어느 날 내가 쓴 글을 보며 스스로 감탄해 마지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셋째, "글쓰기는 누군가를 향한 대화다.(관계성)"
글쓰기 강좌마다, 누군가를 앞에 있다고 상상하며 대화하듯 글을 쓰라고 강조한다.
글은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아내에 대한 사랑을, 자식에 대한 애틋함을 담을 수도 있다.
직장상사에 대한 험담일 수도 있고 동료에 대한 시기심일 수도 있다.
상대를 떠올리며 면전에서 대놓고 하기가 쑥스러운 말, 거북한 말, 비난의 말, 속 깊은 말들은 표현해 낸다.
같은 주제라도 상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기분, 느낌, 감정이 개입된다.
이를 뭉뚱 거려 표준화한 데이터로 생산한 평준화된 문장에는 대화의 온기와 진심이 묻어나지 않는다.
바둑계의 원로 전설 조훈현 9단은 AI가 나오고부터 기사들의 기풍이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했다.
그전엔 기사마다 고유한 스타일이 있었다.
조훈현은 '제비'라는 별명처럼 행마가 가볍고 빠르다.
상대가 잡으려 하면 어느새 빠져나가 있고, 방심하면 순식간에 급소를 찌른다.
그의 제자, '돌부처' 이창호는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고 아슬아슬한 집 차이로 승리를 확정 짓는 신산(神算)의 귀재이다.
바둑의 패러다임을 전투에서 계산으로 바꾼 인물이다.
이창호의 견고한 성벽을 허문 이세돌은 상대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싸움을 걸어 승부를 결정짓는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기적 같은 묘수를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모두 저마다의 퍼스낼리티로 정글 같은 세계 바둑계를 호령하던 승부사들이었다.
요즘 바둑은 AI가 추천하는 최선의 수를 따라가야 이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기사들이 너도나도 AI가 제시하는 수법을 그대로 따라 배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AI가 제시하는 '정답'을 모델로 공부하면서 바둑 실력은 상향 평준화되었다.
그러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인간적인 창의성과 독창성은 옅어지고 있다.
예전엔 기보만 보아도 누가 뒀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 AI로 인해 무개성의 시대가 되었고, 바둑이 가졌던 고유의 멋과 맛이 사라지고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글쓰기도 이와 다를 리 없다.
바둑의 기풍을 글쓰기의 문체로 바꾸면.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책 한 권을 내겠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글을 한 편 두 편 올리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글쓰기는 몰랐던 나 자신을 찾아가는 일,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책을 내는 것 자체보다 내 삶의 기록을 남겨두고 싶은 소박한 바람이 더 앞선다.
내 아이들이 훗날 내 글을 읽으며 나는 어떤 아빠였는지 기억하는 상상을 해본다.
조회수만 바라보며 AI를 이용해 팩트만 던져주면 글을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 그 순간의 내 생각과, 감정, 느낌을 AI에게만 맡길 순 없는 노릇이다.
내가 쓴 글이 어설프고 투박하지만 훗날 내 아이들에겐 더 진정성 있게 다가가지 않을까?
내 허접한 글들을 읽고 많은 분들이 과감히 하트를 클릭해 주신 까닭도, AI의 세련된 기교가 아니라 나의 어수룩한 진심과 투박한 고뇌의 결과에 응답하는 것이라 믿는다.
* 이 글 중, 조영남 씨 소송과 바둑기사의 기풍은 제미나이를 통해 팩트 체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