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에 관하여

by B급 인생

같이 근무했던 직원들과 가끔 모여 수다를 떨다 오곤 다. 처음엔 함께 일하며 정들었던 직원이나 나를 잘 따르던 후배에게 밥이나 사주자고 한두 명씩 불러냈던 게 계기였다. 이 부서 저부서에서 만난 직원들을 따로 보기 번거로워 어느 날부턴가 나를 중심으로 합석하자고 했다. 나는 다들 잘 아는 관계였지만 서로 간에 안면이 없던 사이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회사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서 금방 격의 없이 어울렀다. 안면을 트고 함께 수다를 떨고 나니 동질의식을 나누는 듯도 했다.


이 만남엔 은연중에 원칙이 있었다. 업무나 승진 같은 심각한 얘기는 하지 기로 무언의 합의가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주로 일상사의 수다였다. 불만도 토로하고 남의 흉도 좀 보는 뒷담화로 각종 스트레스 해소하다 갔다. 거의 모든 만남이 벙개로 이루어지니 부담 없이 그날 참석이 가능한 소수의 사람만 모였다. 그러니 대화가 아주 농밀해졌고 친밀도도 갈수록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친구가 처음 오면 의아해하며 묻곤 했다.


"이 모임은 어떤 인연으로 만들어졌나요?


그럴 때마다 난 늘 이렇게 대답했다.


"인연은 무슨 인연, 마음이 끌리는 사람끼리 형편대로 만나는 거지."


우린 형식도 없고 격식 같은 건 따지지도 않았다. 주제도 없고 목적도 없었다. 그냥 만나서 아무 얘기나 하다 갔다. 상사나 선배 노릇 하려 드는 사람이 없었다. 오로지 수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도 이 책 저 책을 읽다 보니 이런 만남이 정말 괜찮다는 걸 증명해주는 석학들의 글들을 많이 발견했다. 몇 개만 추려 보았다.


고인류학자 이상희 교수는 <인류의 기원>에서 이런 말을 했다.

밤새워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것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습니다.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사람들에게 벌어진 이야기,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 그러니까 주로 수다를 떨기 위해 머리를 쓴다는 주장을 하면서 던바는 이를 사회 두뇌 이론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중략)

그러나 수다의 주제는 누가 아기를 가졌더라, 누가 누구랑 요즘 같이 다니더라, 내가 요즘 눈이 잘 안 보인다 등의 일상생활에 관한 것입니다.

(중략)

수다는 입으로 하는 털 다듬기(grooming)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장류는 서로의 털을 만져 주고 이물질을 떼어 주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합니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쯤 되면 수다는 동물적 본능에 가깝다. 비슷한 얘기가 또 있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의 책, <열두 발자국>에 나오는 이론이다


우리가 만나서 하는 대화의 65퍼센트가 뒷담화입니다. 뒷담화란 반드시 욕이 아니더라도 타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할까요.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뒷담화가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이론과 각자의 사회적 지위를 측정하는 장치가 된다는 이론입니다.


우리 주변 상황을 보면 현실적으로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어쨌거나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은 수다를 통해 사회관계망을 공고히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또 이런 주장도 있다.


인간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무엇보다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협력은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개별 남성이나 여성이 사자와 들소의 위치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보다는 무리 내의 누가 누구를 미워하는지, 누가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는지, 누가 정직하고 누가 속이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중략)

현대 사피엔스가 약 7만 년 전 획득한 능력은 이들로 하여금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 수 있게 해 주었다.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략)

역사학 교수들이 함께 점심을 먹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에 대해 대화할 것 같은가? 핵물리학자들이 휴식시간에 쿼크에 대한 과학적 대화를 나눌 것 같은가? 물론 그럴 때도 있겠지만, 대개는 자기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을 적발한 교수, 학과장과 학장 사이의 불화, 동료 중 하나가 연구기금으로 렉서스 자동차를 샀다는 루머 등을 소재로 한 뒷담화를 떠든다. 소문은 주로 나쁜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언론인은 원래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이었고, 언론인들은 누가 사기꾼이고 누가 무임승차자인지를 사회에 알려서 사회를 이들로부터 보호한다.

유발 하라리의 유명한 책, <사피엔스>에 나오는 글이다. 이 정도라면 수다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밑바탕이라 할만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 모임이 떠올랐다. 주전부리를 하며 애들 키우는 얘기, 남편과 아내 험담, 날 서운하게 한 상사나 동료 고발... 그 수다들이 우릴 강하게 묶어 주었다. 일 년에 두세 번 뿐이었지만, 이 얘기 저 얘기, 횡설수설, 좌충우돌, 걷잡을 수 없는 수다로 시간이 훌쩍 지나가곤 했다. 우리가 더 가까워지고 더 잘 이해할 수 있었 이유가 뭐였는지 그땐 몰랐다. 다만 수다 자체가 참 좋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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