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 집 근처 문화센터에서 수채화를 배울 때 일이다. 우리 강아지를 직접 그려보고 싶어 어떻게 하는지 선생님께 조언해 주십사 부탁했다. 선생님은 다음 시간에 강아지 사진을 가져와서 같이 그려보자고 하셨다.
해서 그날 괜찮은 포즈의 사진을 찍으려고 저녁 내내 강아지와 씨름을 했다. 강아지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얌전히 있을 리 없었다. 사진이 뭔지, 포즈가 뭔지도 모를 강아지를 우격다짐으로 자세를 잡아주려 했으니 나도 참 한심했다. 애초에 좋은 포즈로 잡아 주려는 생각 자체가 잘못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찍어둔 사진 중에 골라보기로 했다. 찍을 땐 맘에 들었는데 막상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 하니 딱히 이거다 싶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강의 하루 전 날이 되어서야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 중에서 서너 장을 골라 프린트해 두었다.
그날 저녁, 복잡하게 보이지 않는 사진 하나를 골라 스케치해 보았다. 미리 그려보면 선생님의 코멘트가 훨씬 잘 이해되리란 계산에서였다. 아내에게 보여주었더니 제법 닮게 그렸다고 칭찬해 주었다. 어깨가 으쓱해져 선생님께도 자신 있게 보여드릴 수 있겠다 싶었다.
강의 날 선생님이 내 자리 가까이 오시자 대뜸 프린트해둔 강아지 사진을 꺼내놓았다. 선생님은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다짜고짜 그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능숙한 솜씨로 쓱싹쓱싹 그려 나가셨다. 전날 내가 그린 그림을 내놓고 조언을 받을 생각이 싹 사라졌다. 선생님의 기가 막힌 그림이 완성되어감에 따라 내 그림은 내놓기가 창피하였기 때문이다. 그림을 마무리하면서 동물을 그릴 때 알아야 할 기본적인 팁을 알려주셨다. 어느새 스케치북엔 복스럽고 귀여운 강아지가 한 마리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그림 자체는 훌륭한데 우리 집 강아지가 아닌 듯 많이 다른 분위기였다. 정성껏 그려주셨기에 대놓고 말할 순 없었지만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선생님도 눈치를 챘는지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반려동물은 주인이 가장 잘 그려요,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그리면 제 그림보다 더 나을 겁니다."
어리둥절했다. 생초보인 내가 선생님보다 더 잘 그릴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나?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그린 강아지 그림을 슬며시 꺼내 보았다. 선이며 구도가 몹시 어색하고 서툴렀지만 우리 집 강아지임에 틀림없었다. 오랫동안 같이 산 반려 강아지였기에 나만 포착할 수 있는 특징과 포인트를 제대로 잡아낸 듯했다. 선생님은 사진으로 첨 보는 강아지를 일반적인 특징만 살려 강아지 답게만 그린 듯싶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오랫동안 같이 살며 애정 어린 눈으로 봐온 강아지를 나보다 선생님이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내 강아지의 생생한 느낌은 내가 더 나았던 게 아니었을까
선생님 그림보다 내 그림이 더 맘에 들었다. 내가 그린 그림을 찍어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다. 며칠 후 한 선배가 그 사진을 봤는지 카톡으로 물었다.
"강아지 그림 누가 그려줬냐?"
"내가 그렸는데..."
"아 그래? 내가 사진 보낼 테니 우리 집 강아지 좀 그려줄래?"
"자신 없는데..."
"밥 한번 살 테니 그려줘"
몇 번을 거절하다 나도 선생님의 말씀을 흉내 냈다.
"반려동물은 주인이 제일 잘 그려요,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직접 그리면 나보다 더 나을 거요."
선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졸랐다. 한 번만 더 조르면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에서 인용해 유명해진 옛 말을 해줄까 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