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랑쉬굴의 슬픈노래에서 성이시돌의 희망찬가까지(제주 2편)
푸른 바다,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 유채꽃, 한적한 여유로움 모두 제주도 하면 떠오르는 아름다운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그 제주가 대한민국 그 어떤 곳보다도 아픔과 애환이 서려있는 곳인지를 알고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제주는 오래전부터 변방의 세계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곡식이 자랄만한 비옥한 토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라의 수도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면서 심지어 그사이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기에 경제적 여유로움이나 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처럼 제주는 과거에는 아니 불과 40~50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땅이었다. 조선 시대 제주에 대한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이곳의 풍토와 인물은 아직 혼돈 상태가 깨쳐지지 않았으니, 그 우둔하고 무지함이 저 일본 북해도의 야만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제주에 대해 악평을 한 이 말은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 그의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이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그뿐만이 아니라 16세기에 유배를 왔던 충암 김정의 글에서도 그런 내용이 보인다. 그의 책 ‘제주풍토록’에도 “글을 아는 자가 매우 적고, 인심이 거칠다”거나 “염치와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제주도를 비하하는 위의 표현들은 다소 과장이 있을지라도 당시의 제주의 상황은 이들의 지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가장 많이 유배를 보냈다는 지역으로 알려진 전남으로 유배를 떠난 이가 129명인데 제주는 200명가량의 유배인들을 맞이할 정도로 고통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게 땅을 빼앗겨 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 쫓겨나듯 건너간 이가 당시 제주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5만 명이나 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대표적인 비극 4.3 사건이 벌어지며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마을 주민 전체가 학살당하는 등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시위를 포함해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이지만, 오랫동안 구체적인 진상규명을 하지 않았다. 이때 살아남은 이들은 가족을 잃고도 ‘폭도의 가족’이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늘 숨죽이고 주변을 의심하며 살아야 했다. 당시 살아남은 이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검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처참한 생활을 하고 결국 죽임을 당했던 현장을 아름다운 다랑쉬오름 근처에 있는 다랑쉬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했던 제주가 지금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하면 서다. 제주에 가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좋지만 지역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간다면 진짜 제주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제주에 가면 확실히 육지와는 다른 개성이 느껴진다. 제주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한라산과 오름, 자유로이 풀을 뜨는 말, 진하다 못해 검은빛을 띠고 있는 토양,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현무암 등 육지의 풍경과는 다르기에 마치 외국에 온 느낌마저 불러온다. 이러한 풍경만 바라보면 아름다움만이 느껴지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실제 제주에서의 삶은 혹독했다. 농사짓기 척박한 땅에 수시로 찾아오는 태풍 등의 자연재해를 늘 제주인의 삶과 함께했다. 역사와 환경 모두 사람이 살기에 녹록지 않았던 곳이 제주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배경 속에서 세계에서도 자랑할 만한 지역개발의 대표 사례가 제주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그곳을 직접 보기 위해 제주시 한림읍 성이시돌목장으로 향했다.
한국형 지역개발의 성지, 성이시돌목장
우선 성이시돌 목장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성이시돌 센터(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악북로 353) 전시관을 찾았다.
이곳은 성이시돌목장의 유래와 함께 아일랜드 출신의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P. J. Mcglinchey, 이하 한국명 임피제)의 생애에 대해 안내를 해주는 곳이다. 성이시돌 센터를 천천히 관람하고 나면 성이시돌목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파란 눈의 제주인 임피제 신부를 빼놓을 수 없고 그를 통해 제주의 지역개발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53년 아일랜드 골롬반 선교회 소속으로 광주에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제주로 임지 배정이 되었다. 제주 한림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하려 보니 성당 건물조차 없어 집을 빌려 가며 예배를 보는 형편이었고 무엇보다 굶주린 주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선교 활동 이전에 굶주림부터 없애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아마 당시 제주의 현실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움을 넘어 의지를 갖추고 행동에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임피제 신부는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가장 먼저 시급한 것은 굶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농산물 수확량의 개선을 위해 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주민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그저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지지 않았다. 이래서는 굶주림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임피제 신부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교육한다면 변화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25명의 청소년을 모아 4-H클럽을 조직하게 된다. 4-H클럽이란 1902년 농업구조와 농촌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미국에서 처음 조직된 청소년 단체이다. 4-H는 두뇌(head) · 마음(heart) · 손(hand) · 건강(health)의 이념을 가진 청소년단체로, 국내에서는 1947년 시작돼 학생들에게 작물 재배, 선진영농기술 교육, 생활환경보전 등을 교육하였다. 이는 농업이나 환경, 생명의 가치 등을 중시하고 농업과 농촌을 이끌 전문농업인의 자질을 배양하기 위한 청소년 교육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임피제 신부는 이들을 대상으로 가축을 기르는 방법을 교육하고 가축은행을 설립하여 가축의 수를 늘려 소득을 올릴 방법을 전파하였다. 이후 4-H클럽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이 늘어나자 주민들도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이 지금의 이시돌 개발의 주역이자 훗날 제주 지역개발의 선봉대로 나서게 된다. 이후에 벌어진 일은 많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이시돌 목장은 1970년대 중반 거대한 축산과 사회복지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복합단지가 되었다. 세계에서도 이러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결과가 한 외국인 신부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 독특한 지역개발 사례를 논하기에 앞서 지역개발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지역개발 모델을 설명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그중 다음의 분류한 방식에 따라 성이시돌목장의 사례를 적용해 보고자 한다.
이 방식에 따르면 지역개발의 주체가 지역주민, 지역기업, 지역자치단체 등 내생세력이 중심이 되는지 아니면 외부 출신의 사람, 기업 등 외생세력이 중심이 되는지와 지역개발의 이익이 특정 사람, 기업에만 흘러가는지 아니면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과 사회에 균형적으로 흘러가느냐로 구분한다. 이 중 최악의 모델이 제3 모델이며, 제2 모델이 가장 건강한 모델이라 볼 수 있다. 성이시돌 목장의 경우 임피제 신부를 중심에 두고 본다면 제4 모델이라 할 수 있지만 일생의 대부분을 제주에서 보냈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개발한 것으로 본다면 제2 모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제2와 4모델 모두를 가지고 있는 성이시돌목장의 지역개발 사례는 그래서 특별하고 의미 있는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지역개발에 있어서 환경이든 사람이든 개발을 할 수 있는 자원이 필요하다. 우선 신부님은 당시 한림읍에서 돼지를 키우는 지역주민들이 개발의 주체이자 기본 자원이라고 생각하여 돼지를 통해 수익을 더 창출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했으며 그 시작을 지역 청년들의 교육을 통해 성공할 수 있었다. 청년들을 통해 돼지를 키우는 전문성이 지역주민들에게 퍼져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돈 산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저금리로 토지를 분양하고 소와 돼지도 공급하며 양돈기술을 가르치는 교육센터를 설립하여 의지만 있으면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개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많은 지역개발 사례가 있지만 결국 그 지역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주민들이 변하지 않으면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오히려 외부에서 들어온 기술과 자원에 기대어 더 나태해질 위험도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부님의 방식은 지역 주민들이 가진 자원을 바탕으로 그들이 변화하도록 이끌어 갔다. 변화의 마중물은 신부님이 부으셨지만 펌프질은 지역주민들을 통해 땅속 깊은 곳에 있던 맑은 물을 끌어온 것이다. 또한 이후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적은 돈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였고 이는 그라민뱅크 사례와 아주 유사하다. 그리고 목장에서 키운 양의 털을 활용하여 고급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한림수직을 통해 당시에는 혁신적으로 여성들의 권익 향상을 이뤄냈고 이러한 역량 강화가 결국 지역에 재투자가 되어 성장을 이끌어냈다. 이 모든 것에는 지역의 자원을 활용하고 지역주민을 통해 발전시켰으며 그 결과물이 지역으로 돌아가는 구조로 되었기에 지금의 성이시돌목장이 있을 수 있었고 훌륭한 지역개발사례가 될 수 있었다.
결국 개척 농가가 성공하자 임피제 신부는 지역을 하나로 묶어 개발하는 것을 고안해냈고 한림 주변 전체를 조합원으로 하는 협동조합형 지역개발 모델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다음 조직표가 1976년 이시돌협회의 당시 조직도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제이시돌 축산회사, 성이시돌 실습목장, 제주유휴지 개발, 부락공동목장개발, 농민교육, 지역사회개발, 협동조합 육성은 모두가 지역 전체를 묶는 협동조합식 개발을 위한 조직과 기능이었다. 1976년 기준으로 이시돌협회의 규모를 보면, 직원이 462명에 예산이 12억 7317만 4000원이었다. 당시 북제주군의 공무원 수는 약 350명(1973년 북제주군 공무원 정원은 295명)정도였고, 예산은 13억 817만 2000원이었다. 이시돌협회 인원은 북제주군보다 많았고, 예산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당시 이시돌협회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성이시돌목장은 지역 내에서만 영향을 미치는 곳이 아니었다. 1961년엔 축산업 교육과 실습 등을 목적으로 성이시돌목장을 세운 이후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 등지에서 선진 축산기술을 꾸준히 도입해 목장 운영의 전문성을 키웠고, 축적된 기술은 전국으로 보급됐다. 특히 1973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이 이시돌 목장을 찾아볼 정도로 전국에서 목장 운영의 우수 모델이었다. 이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져 이시돌 목장은 급격히 성장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성이시돌목장은 어느 개인의 능력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 마을 기업 그리고 정부가 연계된 가장 이상적인 성공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이야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유명해졌지만, 지금의 성이시돌목장이 있기까지 임피제 신부와 마을 주민들의 여러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뭉클하게 느껴졌다. 일평생 제주와 한림읍 주민들을 위해 헌신하신 임피제 신부의 동상을 보며 기도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이동 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