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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ngland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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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 Sep 06. 2016

Season2, 그 여자 이야기

Episode of the woman

이른 일요일 아침, 저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추워서도 아니고, 너무 많이 자서도 아니다. 알람은 이미 꺼져있었지만 그래도 꽤 이른시간이다. 다시 눈을 감고 자려니 아쉬워서 휴대폰 알림내역을 뒤적인다. 카톡이 잔뜩 와 있다. 대부분이 한국에서 온 카톡들이지만 한 카톡이 눈에 선명히 들어온다. '내일 6시에 보자~ ' 짧은 문장이였지만 꽤 두근거리는 내용이다. 아직 잠에서 덜 깨어 멍한 체 '6시에 왜 보자는걸까' 라는 생각을 하던 중 벌떡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시간을 확인하고 아직 10시도 지나지 않은 아침임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쓰러져 누웠다. 새록새록 토요일 저녁의 일이 기억이 났다.


토요일에 런던에서 처음으로 옷을 샀다. 신발 한켤레는 산적이 있었지만 옷은 처음이였다. 항상 옷가게를 들리면 들었다 놨다만 반복하고, 피팅룸에서 입어보고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보며 '이건 꼭 사야한다' 라는 '생각'만으로 그쳤었다. 그러다 어제 마침 날씨가 급변하는 기념으로 단단히 작정하고 옷을 구매했다. 새 옷에 너무 신났던 탓인가, 평소에 하지도 않던 약속을 만들어버렸다.


정말 즉흥적이였다.

옷을 사서 돌아온 뒤, 방안에서 이래저래 코디해보고 혼자 스스로 흡족해하며 내 머릿속의 런웨이를 펼쳤다. 사람 마음이란게 다 그렇듯이 새옷을 사니 입고 나가야 한다는 욕구가 용솟음쳤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친구에게 일요일에 밑업에 가자고 했고 늦은 저녁에 연락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이다. 기절하듯이 잠에 골아 떨어져서 일찍 일어난건지, 아니면 새옷을 입는다는 기대감 때문에 눈이 떠진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걱정이 앞섰다.


사실, 친구에게 가자고 한 밑업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안가는 곳 이였다. 런던에서 가장 큰 랭귀지 익스체인지 모임이라는 허명에 속아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거긴 완전 늑대 소굴이다. 뭐 꼭 다그런 것은 아니다. 분명 좋은 사람들도 만나서 즐겁게 놀고 이야기를 나누었기도 했지만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란 점이다. 일단 엄청 시끄러운 분위기다. 바에서 진행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시끄러울 수 밖에 없긴하지만 클럽에서 음악 틀어놓고 이야기하는 정도로 안들리고 말하기도 힘들다. 영어를 잘하고 말고를 떠나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무튼 예전에 한번 친구랑 같이 가기로 했었는데 내가 파토를 내버려서 기왕 나가는거 좋은일 하자는 생각에 무턱대고 약속을 잡았다. 게다가 새 옷으로 인한 자신감 폭풍 상승의 영향도 있었다. 걱정은 잠시 미뤄두고 밑업갈 준비에만 신경쓰기로 했다.    


친구가 교회에서 예배를 끝내고 출발한다는 소식에 먼저 밑업장소로 향했다. 레이스터스퀘어, 극장가 주변에 있는 바에서 열리는데 그 주변에 (어딜가든이긴 하지만) 길거리 공연이 많다. 힙합 댄스부터 난타, 그림전시, 축구공으로 묘기를 부리는 등 보고 즐길 공연이 많다. 만나기전에 공원을 돌면서 구경이나 할 생각으로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도착해서 굉장한 이탈리아 형들의 스트릿댄스를 보고있는데 전화가 왔다. 뛰어왔는지 숨이 찬 목소리였다.

너, 어디야?

목소리에 살짝 짜증이 묻어나있었다. 약간 의아해서 화면을 켜보니 카톡이 줄줄이 쌓여 있었다. 공연보느라 카톡이고 친구고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 뜨악하는 심정으로 다급하게 만나기로한 장소로 뛰어갔다. 그녀는 두리번거리면서 나를 찾고 있었다. '미안' 멋쩍게 웃으며 뛰어가는 시늉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넌 어떻게된 애가 맨날 그러냐?!!' 할말이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저런거 가지고 화를 내냐라고 하겠지만, 사실 내 잘못이 크다. 한, 두번이 아니였다. 어떻게 된게 항상 나와 휴대폰이 멀리 떨어져있거나, 뭔가에 집중해서 신경쓰지 못할 때 급하게 그녀에게서 연락이 온다. 이런 일이 몇번쯤 반복되고 쌓이다보니 폭발한 것이다.


너랑 안 맞을 수도 있어, 아니, 안 맞을꺼야.

들어가기전에 말했다. 어떻게 보면 기대에 찬물을 끼얹은 거지만 개인적인 이기심으로 인한 한마디였다. 나도 별로 좋아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잔뜩 기대하고 왔다가 실망하면 그녀 뿐만아니라 나도 기분이 상할 것이다. 그래서 미리 밑밥을 깔았다. 그녀는 딱히 내 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지만 밑업장소로 내려간 순간 굳어진 그녀의 표졍을 볼 수 있었다. 워낙 솔직한 성격인 친구라 바로 튀어나왔다. '야, 나 얼마 안있다가 여기 나갈 것 같다.' 웃음이 나왔다. 매우 정직한 반응이였다. 하지만 기왕 온거 그냥 돌아갈 수 도 없으니 일단 즐기기로 했다.


이곳이 그나마 괜찮은 점은 술값이 싸다. 9시 이전까지만이긴 하지만 모든 술값이 반값이다. 9시 이후까지 있을 생각도 없고 술도 많이 마실 생각도 없으니 짧게 놀기에는 나쁘지 않은 곳이다. 각자 하이네켄 한병씩 손에 들고 잔을 부딛히고 건배를 외치며 흩어졌다. 굳이 한국인 두명이서 붙어다니면서 이야기하는 것 보다 더 낫다라고 생각했다. 나와 그녀는 곧 인파에 섞여 서로를 잃어버렸고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2시간 동안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난, 그녀를 항상 눈에 담아두고 있었다.

스릴러에서나 나올법한 대사다. 다만 소름돋는 끈적함이 아닌 호기심이 담긴 눈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녀와 헤어진 나는 이내 몇몇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남미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다만 시끄러워서 말의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냥 대충 끼워맞춰서 반응만 해주었다. 그러다 가끔씩 그녀와 만나서 서로 소개를 해주는 등 서로를 눈에 넣어두고 있다가 갑자기 그녀가 사라졌다. 두가지 생각이 단숨에 들었다. '답답해서 먼저 올라갔나?' 하지만 아닐 것이다. 최소한 이야기를 하고 갔으면 갔지 그냥 사라지는 성격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붙잡혔나?' 여기서부터 사고가 앞으로 달렸다. 걱정도 걱정이지만 궁금했다. 그래서 잠시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과 떨어져서 그녀를 찾았다. 이내 쇼파에 낯선 남자와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가 보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긋 보느라 그녀의 표정은 못봤지만 나름 괜찮은 분위기였다.


그 뒤부터 그 쇼파를 중심으로 조금씩 자리를 옮겨가며 사람들과 대화를했다. 주기적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녀를 확인했고 조금 마음을 놓았다. 자리를 옮기다 프랑스에서 온 젊은 여성분과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갈 수록 더 시끄러워지는 통에 거의 얼굴을 귀에다 붙이고 이야기를 해야할 정도였다. 나름 재밌게 귓속말을 주고 받다보니 목이 뻐근한 것도 잊었다. 그러다 목이 너무 아파 잠시 고개를 들고 기지개를 펴는데 그녀가 사라졌다. 꽤 주변이 잘보이는 곳에 서 있었음에도 그 어느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 여성분께 양해를 구하고 떨어져서 그녀를 찾았다. 화장실을 갔을 수 도 있잖아라며 스스로를 안도시켰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휴대폰을 켜보았지만 지하라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무작정 인파를 헤치며 찾아다녔다. 안그래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인이라 쉽게 눈에 띌텐데도 보이지 않았다. 연신 Sorry를 읊으며 이리 밀고 저리 밀고, 새 옷에 부딛혀 쏟긴 술에도 아랑곶 하지않고 다녔다. 그나마 다행이였던 건 아까전 까지 그녀와 있던 남자가 홀로 와인잔을 들고있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그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지만 포기했다. 표정이 딱 똥씹은 표정인게 그녀와 잘 안됬나보다. 한창 잘 대화하고 있었는데 헤어졌다는건 뭔가 핀트가 맞지 않았다는 것일텐데 그렇게 헤어지고 기분이 나빠져서 올라간걸까. 아니면 혹시 이상한 사람이라도 만났다던가. 바에서 가장 높은 스탠드에 올라서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희미했던 그녀와의 대화가 겹쳐왔다.


'야, 우리동네 너무 무서워... 밤에 못 돌아다니겠어...'

'런던이 한국도아니고 밤은 당연히 위험하지.'

'아니, 그게아니라 그냥 6시 7시에 집근처에 양아치 같은 애들이 너무 많아.'

'왜? 걔들이 뭔 짓이라도 해?'

'막, 지나가는데 옆에서 휘파람 불고.. 표정 찡그리면 왜그러냐면서 단체로 웃고.. 무서워.'

'헐.. 그냥 무시해, 지들이 뭐 어쩔껀데?'

'야! 너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하냐? 너랑 나랑 같냐?'

'하.. 하긴 그러고보니 여자는 좀 무섭겠네.' 할퀴듯이 내려치는 목소리에 쫄았다.

'에휴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니.' 그녀가 포기하듯이 내뱉었다.


확실히 요즘 그녀가 불안에 떨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들을 때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공감이 잘 안되기도 했고, 워낙 이런 일로 불평이나 고충을 토로한 일이 많아서 그냥 좀 많이 민감한가보다라고 생각했다. 어지간한 일에는 무덤덤한 나일지라도 이런 말을 들었었고, 지금 막상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니 불안했다. 10분, 15분.. 시간이 흐르고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녀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쥐어져있던 주먹이 스르르 풀리고 그제서야 등이 축축하게 젖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은 땀인지, 아까전에 부딛혀 쏟힌 맥주인지 와인인지 모를 액체인지.. '이게 뭐하는 짓인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녀가 무사하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약간 지친듯한 표정의 그녀를 보니 이제 그만 갈까라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또 다른 남자들이 그녀에게 대화를 걸었다. 생각과는 달리 그녀는 꽤 밝아진 표정으로 그들에게 인사하며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냥 피곤해서 위에서 잠시 쉬고 왔나보다.

지금 생각해도 멍청한 안심을 하고 돌아섰다. 분명 그 때, 난 그녀를 붙잡고 올라갔어야 했다. 그녀를 뒤로 한 체, 아까 전 프랑스 여성분을 찾았지만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안타까웠지만 또 다시 새로운 사람을 찾을 수 밖에.


그로부터 30분정도 뒤 갑자기 등 뒤에서 따가운 아픔이 느껴졌다. 그녀였다. 너무 놀라서 욕짓거리를 내뱉을 뻔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고 쏙 들어가버렸다. 너무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냥 그게 느껴졌다. 반가움과 기쁨으로 가득한 얼굴이였지만 잠시 덧씌어진 표정이였다. 역시나 환한 얼굴은 곧 사라지고 서러움이 담긴 목소리가 토해졌다. '너, 어디갔었어... 진짜... 나, 너 찾는다고...' 목이 매였다. 안쓰러웠다. 더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그녀를 토닥이며 바를 빠져나왔다. 그녀는 술을 많이 마셨는 듯 취해있었고 감정 조절이 힘들어보였다. '너, 진짜... 그러는거 아냐... 그러면 안돼...' 꼬인 혀로 채찍으로 내려치듯 원망을 토로했다.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알고 있었음에도, 애써 무시하고 괜찮을 거라고 혼자 자위하며 넘긴 무책임함의 결과다. 정말 미안했다.


집에 가기전에 술을 좀 깰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근처의 식당에 갔다. 간단히 먹을 것을 주문하고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서늘한 밤공기가 둘 사이를 촘촘히 메꿨다. '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바람에 타고 귀에 들어오듯 선명하게 들렸다.

너무 힘들다.

그 한마디로 그냥 이해할 수 있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보다 더 와닿는 말이였다. 다만 공감은 해줄 수 있을 지언정 위안을 해주기에는 말 주변이 너무 없었다. '다 힘들지..' 고작 한다는 말이 이게 전부다. 그녀는 화낼 힘 조차 없는지 아니면 그냥 예상하고 있었는지 예상했던 질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줄줄이 오늘 있었던 일들 그리고 전에 있었지만 미처,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쏟아내었다. 대부분 듣기만 했지만 내가 만약 여자였으면 그녀의 고생에, 고난에 절절히 공감하며 같이 부둥켜 안고 울고 있지 않았을까.


타지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전부 다해보고 의지 할것이라곤 저 멀리에있는 가족, 친구 혹은 나 뿐인 그녀는 오늘 한꺼풀 풀어내고, 또 속에 끌어안고 지쳐 잠에 들었다. 그녀를 데려다 주고 집에 돌아가는 길, 온갖생각이 떠올랐다 내려앉았다를 반복했다. 어학연수를 왜 온걸까.. 난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어주는 사람인가.. 부질 없는 고민만 써내려가다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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