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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 Nov 10. 2015

#12 '본다'란?

어떻게 보십니까?

한명의 공대생으로서 주관적으로 기술하였습니다.

관찰 일기를 씀에 앞서 관찰에 대해 잠깐 이야기한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관찰을 지속하다보니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경우는 관찰을 할경우 사물의 모양새, 무늬, 보이는 그대로를, 사실로써 받아들이기에 급급한 반면 어떤이는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만 봐도 시상이 떠오를 만큼 감정을 포착해내는 사람들도 있다. 연탄재를 보고 뜨거운 사랑을 말 할 수 있다니, 감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관찰을 하기 위해선 '본다' 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들을 이해하고 넘어가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관찰도 본다는 행위의 일종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등에 식은 땀이...

사실 '본다' 라는 것은 딱히 사전적 정의가 없다. 마치 1+1=2 처럼 말이다. 하지만 1+1=2의 증명이 존재하듯 '본다'에 의미를 두고 오랜시간 탐구해왔다.

과연 우리가 흔히 무엇을 본다란 무슨 의미일까. 누군가는 눈을 통해 사물을 본다라고 할 수도 있고, 생물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은 빛을 시신경이 받아들여 뇌세포에 전달한다라고 말 할수도 있으며 예술가들은 보이는 것 이면에 내재되어진 어떠한 감정을 본다라고도 하며 철학적인 사람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는 언어로 표현해낼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본다'는 수많은 다양한 언어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떻게 구분해야 이해하기 쉬울까?

 

그래서 항상 그렇듯 이분법으로 나누어 본다면, 과학적인 의미의 본다, 그리고 인문학적인 의미의 본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과학적인 의미에서란 말 그대로 생물학적 구조에 따른 보는 방식과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려고하는 것, 이렇게 2가지가 있다.

생물학적으로는 사물에 반사된 빛이 눈으로 들어와 망막에 맺히면 시신경이 그 신호를 뇌세포에 전달하여 우리는 볼 수 있다. 너무 간단하다. 물론 신경의 구조를 세세히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이렇게 간단 한 방식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사진기가 탄생했고, 지금은 디지털카메라로 고해상도의 사진과 동영상을 찍을수도 있다. 눈으로 보는 것과의 차이는 단지 눈이 가진 압도적인 화소수 뿐이다.

눈의 구조 (네이버 지식백과)

그렇게 빛으로 받아들여진 정보를 매우 객관적으로 사실만을 추려서 보는 것이 과학자들, 엔지니어들이다. 매우 효율적이고 군더더기가 없는 탓에 그들은 가끔 감정에 메말랐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일을 하는데 있어 필요없는 것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살벌한 분야다. 만약 1+1=2 에 사색을 들인다면 2는 3이되고 사랑이되어 논문을 쓰다가 저 머나먼 핑크빛 세상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인문학적인 의미에서란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그 사물의 내면을 자신만의 방법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사실 문학을 제대로 배운것도 아니라 정확히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간단히 예를들어 고등학생 시절 배운 국어 교과서에 들어있는 수많은 소설들과 시를 떠올리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수많은 밑줄에 그 밑에 적혀진 단어하나하나에 담겨진 작가의 의도, 그 의도를 세련되게 만들어주는 수많은 기법들. 그들은 개미 한마리 조차 새롭게 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평범한 고등학생들에게는 너무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뿐이지만말이다.

관동별곡....만 생각하면(※그냥 예시 사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의미에 중점을두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이 점이 아마 이공계와 인문학도를 나누는 가장 큰 경계선이 아닌가싶다. 칸트의 관념론에서 사람은 보는 관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받아들인다라고 한다.

예를들어 봄철만 되면 난무하는 벚꽃들을 보면 따뜻함과 산뜻함을 느껴, 시상을 떠올리기도 하고, 좋아하는 이성에게 좀 더 적극적인 마음으로 대쉬하는 사람도 있고 꽃을 보며 식물의 생식기를 보며 왠 감상에 빠지냐라고 혀를 차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벚꽃을 좋아는 하지만 가끔 태우고 싶을 때가 있다.

이 두사람은 과연 어떠한가. 일단 첫번째 사람은 꽃이 자신에게 주는 느낌을 표현했다.  다른 한명은 꽃을 있는그대로 지식에 접목해서 사실을 말했다. 이 차이는 주로 가치관에 의해서 들어나는데 앞사람은 감성적인 사람이다. (물론 꽃을 보고 저런 감정을 안느끼는 사람이 어디있느냐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감성적으로 뒤쳐져서 저 표현말고 어떻게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을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뒷사람은 분명 자연과학을 전공했거나, 공학도일 것이다. 혹은 관심이 많거나.


간단히 말하자면 머릿속에 든것의 차이로 눈으로 본것을 인식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그러니깐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해도 개개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각자 다른 필터를 걸친 결과물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본다는 것은 생각한다의 연장선에 있다.

본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


현 사회가 다양성이 극대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의 다양성도 매우 중요시여겨진다. 그 말인 즉슨 세상에는 매우 다양한 세상이 사람들 생각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작가들, 전문가들이 시나 소설로 표현하거나, 수필, 논문 등 수많은 글들로 정리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세계를 보여준다.

책은 옛 생각과 현재의 생각을 이어준다.

난 아직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편이다. 시도 쓰고싶도, 논평도 써보고싶기도 하다. 한분야만 파는게 좋지 않겠느냐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깊이보다 넓이에 치중하고 싶다. 많이 써보고 경험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는것같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있다. 차근차근히 보는 시각을 넓혀 언젠가 나 스스로가 작가라고 말 할 수 있을 때가 오기를 기대한다.

정말 밝고 아름다운 미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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