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도 가끔 있기는 하지만, 삶이란 대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는 과정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능력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자기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을 잘 들여다보면 누군가의 절대적인 그리고 사소하지만 중요한 협력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산에 있는 나무들은 땅과 비와 바람과 더위와 추위의 도움으로 성장하였고, 곁에 있는 나무들과 때로 경쟁 상대가 되기도 하고, 서로에게 보호막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기 혼자만의 능력으로 성장하였다고 하는 건 아이가 저 혼자 자랐다고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독불장군(獨不將軍)은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장군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하여야 한다는 뜻이며,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되었다면 그것은 주변과 잘 조화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신영복은 그의 글집 「처음처럼」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뒤돌아보라>
길을 걷다가
골목이 꺾이는 길모퉁이 같은데서
재빨리 뒤돌아보라.
거기, 당신의 등 뒤에
당신을 지켜주는 손이 있다.
어머니의 손 같은,
친구의 손 같은.....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손 같은, 친구의 손 같은, 우리를 지켜주는 손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성장해 왔습니다. 조금만 겸손해지면, 이런 손길을 문득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손길이 있어서 이만큼의 행복과 평화를 지금 누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 삶은 훨씬 넉넉해집니다. 어머니의 손 같은 「지켜주는 손」을 자연으로 확장하면 그 감동은 가슴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자연의 섭리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산속 깊은 계곡에서나 넓은 바다에서 기쁨을 느끼고 위로를 받을 수 있음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임을 가르쳐주는 자연의 방식입니다.
집 앞에 숲이 있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면 그 숲에 깃들어 사는 새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뻐꾸기도 소리하고, 멧비둘기도 소리합니다(저는 왠지 멧비둘기의 낮고 거친 소리를 기다립니다). 까치와 꿩과 다른 새들도 저 나름의 목소리로 소리를 합니다. 많은 종류의 새가 숲속에서 조화롭게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누구의 지휘에 따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름다운 합창입니다. 숲과, 숲에서 어울리며 사는 새들이 만드는 조화로움입니다.
나무들이 모여서 숲을 이룹니다. 한 나무는 다른 나무와 더불어 숲이 됩니다. 나무는 숲을 이루고, 그 숲에 의지하며 삽니다. 이것이 상생(相生)(상생보다 더 멋진 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입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합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숲을 지키자」—신영복이 말하는 「더불어 숲」은 이런 더불어 살아가는, 진솔하고 현실적인, 그러면서도 이상적인 삶의 풍경입니다. 조화로움에서 오는 아름다움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창조자입니다. 아이를 낳았다는 출생의 의미도 있지만 그 아이를 이 숲의 한 나무로 키웠다는 뜻에서의 창조(지켜주는 손)라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자는 자식에 대해 영원한 책무를 스스로 집니다.
숲은 나무와 새와 같은 개별 요소의 단순한 집합이 아닙니다. 그저 모여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숲은 이들의 유기적인 결합입니다. 서로 다른 개체들이 모여서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격려하며 사는 유기체입니다. 이것을 생물학에서는 창발성(創發性 emergence, emergent properties)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창조자로서의 부모는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을까요? 부모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입니다. 나누어 주어서 기쁨을 느끼기 보다는 주는 일을 숙명으로 아는 존재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런 부모에게 한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모든 나무가 함께 숲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숲 속에 새도 살고 벌레도 살아서 풍성하고 평화로운 들판이 되고 산이 되는 것입니다. 큰 나무가 작은 나무를 억누르고, 필요한 만큼 보다 더 많은 양분을 섭취하여 다른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며, 너무 큰 그늘을 만들어 다른 작은 나무나 풀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숲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서로 다투지 않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도와주는 나무(지켜주는 손)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나무가 숲이 되고, 숲은 나무의 부모가 되며, 부모는 사랑으로 자식을 가르치고, 자식은 다시 부모가 되어 자식을 가르치는 대물림으로 승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은 부모의 소망을 이루어야 하는 승계된 책임이 있는 것이며, 부모는 그러한 암묵의 책임을 자식에게 부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의 생존이 부모에 의해 보장되었던 것처럼, 자식은 그 자식의 생존을 보장하여야 합니다. 생존의 방식은 사랑이며, 그 결과는 평화입니다. 어떤 부모도 자식들의 세대가 평화롭지 않은 세대이기를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부모는 평화로운 세대가 자식들의 세대를 지탱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부나 권력의 세습은 그 퇴폐성과 은폐성 때문에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사랑과 평화의 세습은 세상의 영속을 보장하는 장치로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에 창조에 관여하였던 모든 이들이 원하는 바일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자에 대한 보답은 창조자가 원하는 사랑과 평화를 지속적으로 세습하는 일입니다. 충분한 보답은 어떤 사람에게도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염치(廉恥 부끄러움을 살핌)있는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은 「주는 것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것을 주면서도 준다는 아까운 마음이 없으며, 주는 것으로 자신의 기쁨을 구하지도 않으며, 덕을 베푼다는 생각도 가지지 않고 자신의 것을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주는 것은 마치 저기 저 계곡의 향기로운 상록수가 자신의 좋은 향기를 내뿜는 것과 같으리라. 바로 이런 사람들의 손을 통해 신(神)은 말씀하시고, 바로 이런 사람들의 눈을 통해 신(神)은 대지(大地)를 향해 미소 짓는다.」
상록수처럼 될 수 없다면, 키 작은 잡목의 흉내라도 내어보는 것이 부모에게 조금 덜 미안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식들의 부모로서, 우리의 모습을 닮아갈 자식들에게 잘 어울려 사는 숲의 일부분이라도 만들어주는 일이, 염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