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날 - 일일투어(예류, 스펀, 진과스, 지우펀)
어제는 가이드가 인솔하는 원데이 투어를 다녀왔다. 타이베이 인근 명소를 순회하는 일명 ‘예스폭진지’ 투어를 마치고 나니,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편하고 만만할 여행이리라 생각했는데, 일정을 마치니 역시나 기진맥진했고 피곤하다.
아침에 일어나 체크아웃 준비를 한 후 간단하게 조식을 먹었다. 10시, 호텔을 나와 걸어 시먼딩역 5번 출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10시40분에 출발할 원데이 투어 가이드를 만났다. 백 명 넘는 사람들이 집결 장소에 운집해 있어 깜짝 놀랐다. 40인승 버스가 무려 3대. 착한투어 여행사가 모집한 개인 여행자들이었다. 가이드 말이 ‘일인당 만오천원’짜리 가성비 여행이란다. 맞는 말이다. 종일 타이베이 근교 유명 관광지를 다 도는 여행인데, 버스비 정도의 투어라니. 가이드는 우리 가족을 3호차 7조로 불렀다.
3호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예류였다. 바닷가 암반이 풍화되고 단단한 돌이 남아 기암괴석으로 서 있는 타이완의 국가지질공원인데, 여기에서는 유독 퀸스헤드(여왕머리)가 유명하다. 목은 가늘고 길며 머리를 틀어 올린 우아한 여왕의 머리 형상이라는데, 비바람에 깎인 기암은 점차 여왕머리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10년 전 왔을 때는 무척 감탄하며 봤었던 터라 감흥은 덜했고, 벅적벅적 여행자들이 많아서 깨끗한 사진 한 장 남길 수 없었지만 유명 여행지라는 곳이 이런 곳 아니겠는가 싶어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정오가 지났고 직설적인 막내는 배가 고프다고 아빠를 졸라댄다. 여행 일정을 받아든 나도 궁금하긴 했었다. 일정상 점심을 먹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먹기는 먹을 텐데 식당에 데려가는지 아니면 휴게소에 내려주는지? 마흔 명 넘는 사람들을 통솔하는 가이드는 정신없이 바빠 보여서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번 여정의 목적지는 풍등을 날릴 수 있는 스펀이다. 우리말로 십분(十分)이라는 작은 철길 옆 마을이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은 지우펀인데, 한자로는 구분(九分)이었다. 연달아 방문하는 마을 이름이 10과 9라니...... 왠지 8분 마을도 있고 7분 마을도 있을 것 같은 공상을 한다. 풍등을 날리기 전, 스펀 폭포에 갔다. 10년 전 투어에서는 오지 못했던 곳이라 폭포를 좋아하는 나는 꽤 흥분되었다. 사람의 손을 탔다는 폭포는 내 기대보다 더 장관이어서 전망대에서 오래 머무르며 사진을 찍었다.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현장감을 사진에 담고 싶어 삼각대 없이 최대한 느린 셔터 스피드를 이용해 봤지만 역시나 떨리는 나의 손각대는 든든한 받침이 돼주지 못해 아쉬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폭포를 본 후, 노점에서 육포와 파인애플, 석가 과일을 사서 먹었다. 관광지라서 가격은 무조건 대만달러로 200원이었다. 우리 돈으로 치면 약 만원 정도인데, 아마 한국 관광객들이 만원 정도면 고민하지 않고 사 먹는 모양이었다. 싸지 않은데 생각했지만 출출했고 과일의 맛이 좋아서 만족한 지출이었다. 특히 처음 맛본 석가 과일이 예상외로 달콤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뿐 아니라 아이들도 새롭고 맛있는 과일을 먹어서인지 만족한 눈치였다.
그다음 스펀 기찻길에서 풍등을 날렸다. 풍등 네 면에 각자가 소원하는 것들을 붓으로 적어 날렸는데, 막내는 돈, 둘째는 롤 플레이, 큰아이는 여친 플리즈, 나는 평온을 적었다. 많은 사람이 일시에 풍등을 날려대는 바람에 기찻길은 북적대어, 빨리빨리 사진을 찍고 풍등도 날려대는 통에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우리의 소원이 적힌 풍등은 이내 열기로 팽팽해지더니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가족의 소원이 꼭 이뤄지는 2024년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풍등을 날리고 약간의 간식을 받았다. 닭날개에 볶음밥을 넣은 것과 전병으로 돌돌 말은 땅콩 아이스크림으로 요기를 했다. 땅바닥 계단에 주저앉아 먹는 간식은 별미였고, 이내 배가 불러왔다. 가이드에게 예류의 입장료, 풍등비, 간식값과 진과스에서 먹을 광부도시락 값을 냈는데, 대만달러로 1,950원, 우리 돈으로 치면 약 십만원 정도였다. 아마 이 비용에서 가이드가 일정의 마진을 얻는 구조 같았다. 생각해보니 버스를 가득 채운 여행객에게서 작은 이익을 떼어가면 나름 큰돈을 벌 수 있겠다 싶었다.
다시 일행을 태운 버스는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올라 진과스와 지우펀으로 향한다. 진과스에는 커다란 황금 덩어리를 만져볼 수 있는 황금박물관이 있는데, 누구도 박물관에는 가지 않았다. 모두가 가이드를 따라 ‘광부도시락’을 먹으러 갔는데, 우리도 미리 주문을 해서 가이드를 따라 식당에 들어섰다. 돼지고기구이를 얹은 밥이었는데, 식당 앞에 크게 펼쳐 놓은 이연복 요리사 사진처럼 맛은 훌륭했지만, 개당 만 원 정도라 대만 물가치곤 비싼 느낌이었다. 오천원 정도 한다면 맛도 값도 훌륭할 텐데 말이다. 혹 모를 일이다. 도시락 가격은 원래 오천원인데, 가이드 수수료가 5천원이 붙었을지......
지우펀에서 광부도시락을 먹고 마지막 목적지인 지우펀에 갔다. 가이드는 일행을 젤리가게, 펑리수 가게로 안내하기에, 조용히 지우펀의 명소, 아메이차루를 찾아 나섰다. 구불구불한 길 양옆으로 홍등을 단 가게들이 줄지어 있고, 좁은 길에는 흥청대는 인파가 넘쳐났다. 어깨를 치이며 걷다가 지쳐 쉴 겸 전망이 좋은 카페에 갔다. 카페에 앉자마자 아이들은 게임 삼매경에 빠져들었고 나는 저물어가는 지우펀의 야경을 바라본다. 커피와 주스를 주문했는데, 한잔에 무조건 대만돈 200원, 우리 돈으로 만원이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는 데 20분이 걸렸고, 맛도 연해 물 탄 맛이라 다 마시지도 못했다. 은근히 경제 관념이 있는 둘째 아이만 음료를 주문하지 않았는데, 여행에서 새롭게 알게 되는 아이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호텔 1층 편의점에 들러서 대만 컵라면 순례를 했다. 신중하게 골라 실패하지 않고 맛있게 컵라면을 먹었다. 다른 게 아니라 이런 소소한 것이 여행이라며, 컵라면으로 대동단결한 아이들은 흐뭇해하며 하루 여행을 마무리한다. 아마 유명 관광지보다 호텔에서 맛보는 이국적인 컵라면이 여행의 방점을 찍는 것 같다. 하루의 피로를 샤워로 씻고 아이들은 엄마와 영상통화를 마침으로써 모든 일정을 마쳤다. 자정 넘어 호텔방 불을 껐다. 오늘은 만오천 보를 걸었다. 다행히 발이 아픈 아이들이 없어 감사했다.
다시 아침이다. 잠을 설쳤다. 아침 7시에 일어나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오늘은 느린 여행을 계획 중이다. 아침을 느긋하게 먹고 점심쯤 고궁박물관에 갔다가 단수이에 다녀올 계획이다. 그리고 저녁은 훠궈를 먹어야지. 밤에는 아시안컵 8강전이 있다. 핸드폰에 이심카드를 장착했더니, 인터넷은 잘 되는데, 전화는 되지 않는다. 회사 업무로 걸려올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불안한 마음 들기도 하지만, 잘된 일이다. 감안하고 휴가 낸 것이니, 아무 생각 없이 여행과 아이들에게만 집중하고자 한다.
속 편하게 말이다. 뭐! 나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