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날 - 단수이, 국립고궁박물관, 까르푸, 훠궈
오늘은 늦게 느린 일정을 시작했다. 여행에 지쳐가는 아이들에게 잠깐의 쉼을 주고 싶었는데, 역시 아이들은 호텔 방에서 편히 게임에 빠져있다. 간신히 씻게 해서 11시, 시먼역에서 하루를 열었다. 지하철을 타고 단수이에 간다. 나름 외국에서 지하철을 타는 재미가 있었다. 교통카드를 찍고 지하철에 오르고 레드선으로 환승하여 베이터우역까지 간 후 다시 단수이역까지 가는 열차를 탔다. 우리나라 국철처럼 지상으로 다니는 구간이 많았는데, 타닥타닥 전철이 지나는 소리에 맞춰 차창으로 스치는 타이베이의 잿빛 풍경이 고즈넉해 좋았다. 단수이역에 도착하고 나서는 계속 걸었다. 민물, 담수라는 의미의 단수이는 타이베이를 한강처럼 관통하는 단수이강이 태평양과 만나는 강 하구에 있었는데, 도시의 경치가 평화롭고 조용해서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알맞은 곳이었다. 우리네 한강 공원 느낌이 물씬 났고 언덕에 자리한 시내는 인천 구도심에 온 것 같기도 했다. ‘물이 깊으니 입수하지 말라’는 경고나 ‘폭죽 금지’ 같은 문구로 짐작해 보면, 밤에는 함덕해변처럼 연인들의 소소한 축제가 난장처럼 벌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강변을 따라 걷다가 일본인 타다이키치 고택에서 잠시 쉬었다. 강의 하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한적하고 아늑한 곳에 오밀조밀한 일본식 주택을 지었는데, 정갈하게 보존된 다다미방에 앉아, 고택에 흐르는 평온함을 누렸다. 다시 소백궁과 진리대학, 홍마오청까지 걸었다. 진리대학은 옥스퍼드 칼리지란 학교명을 최근에 개칭했다고 하는데, 예배당을 비롯한 몇 건물이 참 고풍스러워 대학보다는 유적지 같았지만, 한 층 더 들어가니 체육관에서는 체육과 학생들이 테니스 치는 소리가, 한쪽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가득 앉아 있는 모습이, 여전히 젊음으로 활기찬 대학임을 알려준다. 홍마오청은 사실 뭐 별거 없는데, 홍마오청 옆 가정집이 볼 만 했다. 네 개의 침실이 개방되어 있고, 생활 도구들이 진열되어 각자 방을 쓰던 방주인의 신분 차이를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돌아갈 시간이 촉박해 급히 내려왔다. 오는 도중 단수이가 원조라는 대왕 카스테라 한 조각을 사서 요기를 한 후, 현지인 식당에 가서 우육면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고명 가득 올려진 우육면은 꼭 우리네 갈비탕 맛이라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는데, 여행 3일 차에 겁도 사라지고 해서 아이들과 함께 통하지 않는 말에다 손짓을 섞어가며 음식 주문에 성공하고 나니, 괜시리 뿌듯한 마음이 들어 여행 참 잘했다 싶은 마음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스린역까지 되돌아온 후, 택시를 탔다. 국립 고궁박물관이 오후 5시면 문을 닫기에 부리나케 달려간 것인데, 두 시간도 채 관람하지 못하고 끝을 냈다. 십 년 전 박물관에 왔을 때는 박물관이 보유한 대표 보물인 육형석과 취옥백채를 모두 다 봤었는데, 이번에는 대표 유물들의 외부전시로 사진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아쉬웠다. 아이들을 인솔한 여행이라 박물관 기행을 기대했는데, 그냥 얼렁뚱땅 관람한 시간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나름 사전 공부도 해야 알찬 관람이 되었을 것인데, 그러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관람 후 오랜 시간 버스를 기다려 다시 스린역에 왔다. 지하철로 용산사까지 와서 예불을 드리는 용산사 모습을 사진에 담고 까르푸 ‘털이’에 나섰다. 입국 때 둘째 아이가 당첨된 여행지원금을 쓰기 위함인데, 까르푸에서 과자, 치약, 과일 등등을 한 보따리 사서 가방에 둘러맨 채 나왔다. 대만에 오기 전부터 꼭 사리라 벼르던 까발란 위스키를 만지작거리다가 눈물만 머금은 채 놓고 와야 했다. 지금 우리 집 경제 사정이 까발란 위스키를 마실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빌미 삼아, 차후 다시 대만 여행 도전! 인생 버킷리스트에 담긴 동북아 최고봉인 옥산에 등산하러 올 때는 반드시 꼭 한 병 사서 맛봐야지 하는 다짐이다. 까르푸에서 가득 챙긴 짐을 지고 어제 예약해둔 마라훠궈 식당으로 훠궈를 먹으러 갔다. 일 인당 4만원 정도 해서 큰맘을 먹고 가는 것인데, 도착해 보니 예약 명단에 내 이름이 없는 것이었다. 확인해 보니, 오늘이 아닌 일요일로 예약을 해 놓은 게 아닌가? 바보처럼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 아이들과 실망을 안고 돌아갈 수 없어 지배인에게 사정을 말하니, 다행히 예약을 오늘로 당겨주었다. 몇 분 기다리지 않아 자리를 잡고 음식 주문을 했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 음식이 나오는 동안에도, 우리 테이블은 감감무소식이길래, 물어보니, 큐알코드로 접속해 고기를 주문하는 시스템이라는 거다. 기다리다 못해 곁들임 음식으로 배를 채운 나의 무지를 자책하다가 고기가 나오자마자 폭풍 흡입을 시전했다. 끊임없이 주문하는 바람에 서빙하는 점원도 지쳤는지, 점점 놓이는 고기양이 작아졌지만, 비례해 우리 배는 가득 불러 기분만 좋아졌다.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를 하고 호텔로 향했다. 막내가 ‘참 맛있게 먹은 한 끼’라고 자평을 하는데, 인솔자 역할을 제대로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호텔에 와서 씻고 이제 축구를 볼 준비를 하고 있다. 내일은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내로 체크아웃을 해야 한다. 처음으로 기차를 타는 것이라 조금 두려운 마음인데, 블로그로 검색을 해봤어도 발권과 승차 플랫폼 찾는 것들을 처음으로 하는 것이라 여기에서 기인하는 두려움이 꽤 크다. 하지만 닥치면 다 잘할 것이다. 오늘 아시안컵 8강전까지 이기면 한국인으로서 기분이 째지겠지. 아이들과 하는 여행이 즐겁다. 그간 알지 못했던 아들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게 만족스럽다. 아이들도 여행에 흡족해하는 것 같아 행복하다. 오길 참 잘했다. 이번 여행은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떠나는 큰 아이와의 작별을 겸한 여행이라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