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날 - 화렌투어
어젯밤 늦게까지 아시안컵 8강전을 본 아이들을 깨워 아침 일찍 여정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0:1로 끌려가다가 경기 막판 동점 PK골을 넣고 연장전 손흥민의 그림 같은 프리킥 골로 호주를 이겼다고 한다. 초등학생인 막내까지 형들과 합세해 새벽까지 중계를 다 봤다고 한다. 외국에서의 대한민국 축구팀 응원이 기억에 꽤 남을 것 같다.
부리나케 씻고 짐을 챙겨 호텔 체크아웃을 했다. 마음이 급해 택시를 잡아타고 타이베이역에 갔다. 대만에서 시외로 나가는 기차는 처음 타는 것이라 시간 내 발권도 하고 플랫폼도 찾아야 해서 긴장했지만 다행히 일은 술술 풀렸다. 티켓팅도 쉽게 했고 플랫폼도 잘 찾아 여유롭게 기차를 기다린다. 아이들은 캐리어를 의자 삼아 앉아 다시 게임 속에 푹 빠졌다. 나는 먼저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다가 주말 등산을 떠나는 배낭 차림의 승객들을 관찰한다. 신기하게도 많은 등산인이 장화를 신고 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광경인데, 대만에서는 등산 중 비를 많이 만나 장화가 필수라고 한다. 중이다. 드디어 타이베이발 타이둥행 기차를 탔다. 고속철도는 아니고 우리나라의 새마을호 같은 열차였는데, 우리는 화렌까지 갈 예정이다. 두 시간 하고 십 여분이 더 걸리는 기차 여정 동안 아이들은 잠을, 음악을,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나는 차창으로 스쳐 가는 흐린 날의 타이베이 풍경을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어제 늦게까지 잠을 설친 아이들도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하고 있다. 비가 오는지 빗줄기가 차창에 빗금을 그어 흐린 날의 풍경에 쉼표를 점점히 찍고 있었다.
화렌역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가 고비다. 화렌에서는 4시간짜리 택시투어를 예약해 놓았는데, 역에 도착할 때까지 택시기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어떻게 택시기사와 만나야 할지 막막했다. 내 이름을 큰 종이를 들고 개찰구에서 기다리고 있기를 바랐다. 기대는 사치였나 보다. 부산한 사람들 틈에 섞여 기차역을 나왔는데, 넓은 광장에서 예약한 택시를 찾을 수 없었다. 퍽 당황스러웠다. 아는 것이라곤, 택시 번호판밖에 없어서 보이는 택시마다 뛰어다니며 번호를 확인했지만 없다. 한참을 헤매다 어쩔 수 없이 착하게 보이는 현지인에게 택시기사 전화번호를 보여주며 전화를 부탁했다. 친절하게도 전화를 한 후, 택시가 기다리는 정차장까지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족히 20년은 돼 보이는 낡은 택시, 70세는 돼 보이고 씹는 담배를 부족한 치아로 질겅질겅 씹으며 손을 조금씩 떠시는 할아버지가 오늘 여정을 책임져 줄 택시기사시다. 불안한 마음이 앞섰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 하루 스케쥴과 우리의 안전을 이분께 맡겨야 한다. 택시를 타자마자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고파하는 아이들을 위해 맥도날드에 가자고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알아들으시고 드라인브인쓰루에서 햄버거를 샀다. 차에서 맛있게 햄버거를 먹으며 목적지로 향했다. 말이 안 통할 것 같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더니, 기사님은 구글 번역기를 이용하여 필요한 말만 해주셨다.
“이번 목적지는 청수단애입니다. 화장실은 입구에 있습니다.”
번역기를 통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니, 마음이 풀어졌다.
흐린 날, 비도 오락가락한다. 왼쪽으로는 수직으로 치솟은 바위벽이 거대하게 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망망대해 태평양이 아득한 시선까지 넘실거린다. 타이완의 산들은 젊어서 우리나라 산보다 더 높고 뾰족뾰족 서 있었다. 흐린 날이었지만 절벽과 맞닿은 에메랄드 바다가 대만십경 중 제일경이라 불릴 만하다. 제주에서 매일 바다를 보고 사는, 함덕과 김녕의 비췻빛 바다를 마음에 품고 사는 아이들도 감탄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차에서 먹은 햄버거가 배를 압박했는지 둘째와 막내가 화장실에서 큰일을 치르고 싶어 했다. 휴게소의 화장실은 깨끗했지만, 변기가 쪼그려 앉아 누는 구식 변기였다. 내게는 옛 기억을 소환해 주는 물건이었는데, 아이들은 태어나 한 번도 쪼그려 앉아 큰일을 치르지 않았다고 한다. 배는 아픈데, 일 치르기를 주저하는 아이들에게 “쪼그려 앉으면 더 잘 나와”하며 재촉을 했더니, 망설임 속에 결국 모두 성공을 한 모양이었다. 배 아픈 얼굴빛에서 평안한 얼굴로 바뀌어 다행이다.
다음 여행지는 타이루거의 연자구다. 도로를 직진하다 우회전하여 높고 아찔하게 솟은 협곡으로 구불구불 향하던 택시는 안내창구에서 안전모를 챙기더니 연자구 입구에서 우리를 내려준다. 여기부터 계속 걸으며 풍경 속에 빠져들었는데, 도로 중간 관람대에서 발아래로는 아득한 협곡과 옥빛의 물줄기가, 위로는 쳐다보고 있으면 무너져 내릴 것 같을 정도로 엄습해 와 덩달아 주저앉고 싶은 느낌을 받는 산세가 타이루거 협곡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분명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팠을 것 같은 널찍한 동굴이 중간중간 있었고, 길 위로 차들은 엉금엉금, 사람들은 풍경에 넋을 잃은 채 걷고 있다. 모처럼 대자연의 위용 앞에 선 인간이 정말 작은 존재임을 느낀 순간이라고 할까? 어떤 고층 빌딩보다도 위압감을 주는 타이거루 대협곡 속에서 나는 입만 벌린 채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장춘사에 들렀다. 타이루거 협곡길을 내면서 유명을 달리한 인부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사당이라는데, 사당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가 갈래를 달리하며 멋지게 낙하한다. 비가 흩뿌리고 시간이 촉박한 투어 상품이라서 멀리서 바라보며 사진 몇 장 남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화렌시로 돌아오는 도중 칠성탄에 들렀다. 부산의 몽돌해변 같은 느낌의 너른 바닷가에 포말을 뱉었다 삼키는 파도가 들락날락하며 와르르르 해변의 자갈들을 씻기고 있다. 한적한 곳이라 납작하고 동근 몽돌이 지천에 깔린 바닷가에 누워 흐린 하늘을 올려다 본다. 덥지고 춥지도 않은 가을 같은 날씨. 고운 파도와 푸른 바다. 흐리지만 안온한 하늘 아래서 모처럼의 평온이 몰려왔다. 이 바다 참 좋구나! 아이들은 바다에 조약돌을 던지고 파도와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다. 십 여분의 짧은 시간 속, 툭 마음이 트였다.
여정을 마친 기사님은 호텔에 우리를 데려다주고 커브길로 사라졌다. 오후 3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 체크인 후, 방에 들어갔다. 일박에 13만 원 정도 하는, 이번 여정 중에 가장 싼 방이었는데, 작은 도시의 호텔이어서 그런지, 깨끗하고 가장 넓다. 이제 여행이 끝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는지, 침대에 눕자 도무지 일어날 힘이 없었다. 한참을 쉬다가 늦은 점심을 먹자 해서 호텔 앞 KFC에 갔다. 새로운 현지 음식점을 찾아 나설 모험심은 사라져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한 것인데, 현실적으로 남은 대만 현금이 얼마 없다는 점도 이 선택에 한몫했다. 주문하고 결제를 해야 하는데, 분명 카드 단말기가 있는데도, 오직 현금만을 요구하는 점원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현금을 몽땅 써 버렸다. 내일 공항까지 가야 하는 데 필요한 교통카드 충전과 저녁 식사값이 걱정되었다. 시내 구경을 나가자 해서 해변까지 걸었는데, 모두 좀체 흥이 나지 않은 모양이다. 주말이라 시내는 한적하고 관광객은 별로 없는, 주말의 한적함 속에 숨을 고르고 있는 도시를 걷고 있자니, 모두 지친 모습이라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은행 ATM에서 현금을 인출했다. 수수료가 10% 붙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호텔로 들어오니 만사가 귀찮다. 편의점에 가서 과자와 음료, 컵라면을 사 들고 밖에 나가지 않았다. 피곤이 몰려와 일찍 잠들었다. 이렇게 화렌의 마지막 밤이 흘러갔다.
다시 일요일 아침. 아이들은 잠들어 있고 혼자 일어나 일기를 쓴다.
아이들과 며칠 여행을 했더니, 지금까지 어슴푸레 알던 아이들의 특색이 눈에 확 들어왔다. 외출 후 귀가하면 꼭 씻어야 쉬는 것 같다는 나름 깔끔쟁이 큰아이, 체력이 좋고 못 들은 척하지만 모든 대화를 다 듣고 미리 아빠의 형편을 살피는 둘째아이, 그리고 여전히 어려 게임에만 푹 빠져 사는 것 같지만 가끔 상상도 못 할 단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막내아이.
일기 쓰기를 마치면 아이들을 깨워서 조식을 먹어야 한다. 어제는 부실하게 지나갔기에 맛있는 조식을 기대한다. 짐 정리와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다시 화렌역에 가서 타이베이까지 기차로 간다. 그리고 촉박한 시간이라 바로 타오위안 공항까지 MRT를 타고 가서 빠르게 탑승 수속을 밟아야 하는데, 시간 내에 도착하기를 바란다. 뛰어야 할까? 길도 잘 모르는데? 걱정되지만 지금까지 순탄했던 여행을 되돌아보며 용기를 얻는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