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여행하는 12가지 방법

12. 제주, 갤러리 투어

by 온평리이평온

상투적이겠지만 식민지배와 전쟁의 상흔을 겪은 우리나라가 후발주자로서 선진국의 높은 문턱을 넘은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

개발도상국의 질척이는 늪을 빠져나와 사다리가 걷어 차여진 선진국에 진입한 것은 거의 유일한 사례라 하니 괜히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경제 강대국을 넘어 문화 강대국의 시민이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도 예술에 관한 마음이 늘기 시작했다.

미술과 사진사를 담은 책도 읽고 도록을 보면서 심미안을 넓혀 보려 애를 쓰기도 하고 근처 갤러리를 기웃대기도 한다.

무엇보다 미술관과 갤러리기 뿜어내는 그 느낌을 좋아한다.

대가들의 대작이 뿜어내는 아우라에 눌려 숨이 턱 막히면서 짜릿하게 흐르는 미세 전기가 손가락까지 짜르르 흐르는 저릿함이 황홀하다.

그 맛에 이끌려 제주의 갤러리를 탐독한다.

제주 시내의 국립박물관과 도립미술관, 저지리의 현대미술관 등 덩치 큰 갤러리에서 한껏 격식을 차린 채 작품에 빠져보기도 하고 작은 시골 마을에서 열리는 소소한 전시회에서는 가벼운 마음으로 작품 사이를 유영하기도 하면서 그림과 사진에 담긴 당돌한 시선에 감탄하게 된다.

이 장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갤러리와 미술관을 소개해 본다.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했던 제주의 낯설지만 익숙한 모습과 조우하게 되지 않을까?



▢ 선흘리, 그림작업장

제주 동쪽, 중산간에 오소록하게 펼쳐진 동네, 선흘리에 가면 해마다 특별하게 열리는 전시회가 있다.

글과 그림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동네 할망들이 늦깎이 화가가 되어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는데, 때마다 다른 주제로 그림을 전시하곤 한다.

나는 이 전시회에서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동을 얻었다.

그림에서 시골 우리 엄마 향기가 났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그린 그림 한 점을 골라 어깨에 메고 작은 창고 가득 전시된 그림을 보게 되면, 괜히 눈물이 난다.

‘엄마 아피 누우난 막 조아 지치난’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아기가 되어 엄마 품에 안겨 행복해하던 그림 앞에서 나 역시도 어린아이로 돌아간 마음이 된다.

예술이란 게, 그림이란 게 별거인가?

마음을 가득 담아 정성으로 그리면 최고의 작품 아닐까?

갤러리를 찾은 관람객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을 가졌으리라. 모두 눈가가 촉촉하고 입술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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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나는 심술궂은 바람을 좋아한다. 그 바람을 품에 안고 사시사철 중산간 초원을 떠돈다. 내 안에 부는 바람을 어찌하지 못해 바람 타는 섬, 제주도에 정착했다. 제주의 바람에 홀려 제주의 바람을 쫓아다녔다.”

김영갑 선생의 말이다.

아무도 오름에 관심이 없던 시절, 김영갑 작가는 오름에 천착하여 오름의 사시사철을 사진에 담았다.

나는 생전 만나본 적도 없는 이 사진가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사진에 담긴 오름과 제주 풍경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김영갑의 사진에는 바람이 실려 있다.

제주에 마음을 뺏긴 건지, 김영갑의 사진에 넋을 잃은 건지, 아무튼 나의 제주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갤러리 두모악에 처음 간 때의 기억은 여전히 또렷하다.

17×6 규격에 담긴 오름과 억새와 나무를 훑는 바람의 질감은 내 폐부와 뼛속 깊숙이 제주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여전히 감탄하게 되고 늘 감상에 빠져든다.

어느 TV 프로에서 ‘좋아해서 따라 하게 되는 것이 바로 동경’이라고 유명한 작사가가 말했다.

그렇다.

나는 김영갑 작가를 동경하는 셈이다.

그의 사진처럼 사진에 바람을 담고자 노력하지만 쓸쓸함이 배어난 그 오돌토돌한 질감을 나는 담아내지 못한다.

그래도 여전히 동경한다.

그래서 여전히 김영갑 작가의 사진첩을 들춰보고 그의 유작이 전시되는 두모악 갤러리를 자주 찾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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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철, 자연사랑 미술관

제주 역시 개발의 광풍이 불어 바닷가부터 중산간까지 인공의 흔적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래도 가시리만큼은 말이 초원에서 풀을 뜯고 뛰노는 말 그대로 ‘말세상’인 마을이다.

그래서 찾아올 때마다 마음은 정겨워지고 흥겨워지게 된다.

게다가 가시리에는 오름의 여왕이라는 따라비오름이 있고, 삼나무 숲길 따라 갑마장길이 펼쳐져 있으니,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한바탕 걷고 오면 인생을 덮은 묵은 때가 말갛게 씻겨 내려가곤 한다.

가시리에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아름드리 고목 아래 나직하게 자리 잡은 노포의 허름한 식탁에서 두루치기를 배부르게 먹고 배도 꺼뜨릴 겸 마을 구경을 한 바퀴 돌아 마주치는 미술관, 자연사랑미술관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미술관은 폐교한 가시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여 개관했는데, 제주에서 오랫동안 사진기자로 활동했던 서재철 관장의 사진이 상시 전시되어 있다.

제주로 이주한 지 10년밖에 되지 않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하던 옛날 옛적의 제주의 풍경과 자연, 해녀와 포구 등이 흑백과 컬러 사진에 담겨 학교 교실 벽에 나란히 걸려 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제주의 참모습이 벽을 따라 흐르고, 게걸음을 걸으며 사진에 심취하다 보면 제주의 옛 마을 옛 풍경에 푹 빠지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오름을 좋아하는 나는 서재철 관장이 담은 따라비오름 사진에 특히 매료되었다.

3개의 분화구와 6개의 봉우리가 만들어 내는 동글동글한 따라비오름의 모습은 우아하고 기품이 있다.

아늑한 오름의 품과 억새의 부드러움 덕분에 오름에 가면 늘 따스함이 깃든다.

김영갑의 사진에 바람이 담겨 있다면 서재철 관장의 사진에는 그리움이 담겨 있다.

미술관에서 나는 안온한 기분에 빠져들게 된다.

폐교는 쇠락했지만 미술관을 나서는 나는 포근한 마음을 가득 안게 된다.

그래서 가시리가 좋다.

나도 나만의 전시관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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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택화 미술관

제주 시내에서 가까운 조천과 함덕 사이에는 비췻빛 바다가 오목하게 숨어 있는 신흥리가 있다.

불쑥 튀어나온 관곶을 휘돌며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기하기 좋은 이곳에는 김택화 미술관이 있다.

김택화 미술관은 일평생 제주의 풍경을 고집스레 그렸던 화가 김택화의 예술세계와 삶의 여정을 담아낸 공간이다.

특히 화가의 유화 백여 점이 전시되어 있고, 도민들에게 친숙한 한라산 소주 라벨에 그려진 원화가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예술은 그저 하나의 짓이 되는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하나의 짓이 한라산과 성산일출봉, 제주의 포구, 풍경이 유화로 박제되어 사방 콘크리트 벽면에 가득가득 담겨 있다.

어쭙잖은 식견이지만 제주의 풍경이 모네의 그림과 겹쳐 새겨진 것 같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카페라떼 한 모금 들이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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