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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전재복 Mar 16. 2024

*마중 가는 길

봄마중 꽃마중(144)


보라색 물안개가 작은 또랑물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초저녁 어스름은 그렇게 풀섶을 거쳐 내 발목을 감고 돌았다.


소달구지나 겨우 다니던 아랫동네 윗동네를 이어주는 마을길.

봄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 어쩌면 가을이었을까? 확실하진 않지만 보따리 장사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예닐곱 살 계집애가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떼던 초저녁의 그 길은, 보라색 물감이 번진 수채화의 바탕처럼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무섭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멀리서 고개 휘게 봇짐을 이고 바삐 걸어오는 어머니를 향해 달려가면, 온종일 몇십 리 발품 팔던 어머니의 고단함과, 종일 앙칼진 외사촌 올케의 구박에 서러웠던 어린 마음이 글썽이는 눈물로 하나 되어 얼싸안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힘들다는 말씀 안 하셨고, 어린 딸도 구박당했단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집에 있지 왜 나왔어?"


"어머니 걱정되어서..."


나중에 나중에 어른이 되고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옛이야기하며 펑펑 눈물을 쏟았었다.



마중가는 길은 설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다림 끝에 고개 드는 원망 한 움큼, 가슴 끝 저린 슬픔 한 조각, 눈에 아른대는 보고픔 한 다발...



꽃 마중을 하러 사흘 째 쏘다녔다.

이틀은 혼자서 하루는 친구와 둘이서. 은파호수공원과 월명공원을 찾아갔지만 벚꽃, 개나리도 진달래와 목련도 아직은 뜸만 들이고 있었다. 양지바른 화단에서 봄꽃 몇 송이와 겨우 눈맞춤했다.


소문에 듣자 하니 월명공원에 맨발 걷기 황톳길이 생겼다기에 작년에 은파황톳길(황토빛 시멘트길)에 너무 실망한 터라 기대 없이 확인차 찾아봤다. 워낙 예쁜 숲길을 많이 품고 있는 월명공원에 맨발 걷기 황톳길이 제대로만 있어준다면 금상첨화겠지!

그런데 어디에도 황톳길 푯말은 찾을 수가 없었다. 지인이 알려준 대로 '석치산' 표지판을 따라 약 3백 미터쯤 오솔길을 올라갔다.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리고 너 댓사람이 종아리를 드러낸 채 맨발로 땅다짐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산밭 반두렁쯤이나 될까? 한 번에 열 명도 채 못 들어설 옹색한 공간의 질퍽한 황토밭에서 여자 셋 남자 하나가 맨발로 황토죽을 쑤고 있었다.

동호인 몇이 사유지에 만들어 놓은 듯, 어떤 표지판도 시설물도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소득 없이 돌아섰다.


다시 돌아 나와서 저수지를 한 바퀴 돌면서 보니 전에 왔을 때보다 산책로가 많이 정비되었고, 수변로를 따라 새로 만들고 있는 산책로도 눈에 띄었다. 그중 어느 곳은 맨발 걷기 구간도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번에는 제발 제대로 된 맨발 걷기 길과 세족시설도 잘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이왕에 시작된 봄 마중길! 특별히 다른 일정이 없는 한, 하루 한 시간 정도는 봄 햇살 속으로 걸어볼 요량이다.

누구를 기다려 꽃이 필까만, 저 오고 싶을 때 알아서 오겠지만, 정인을 맞이하듯 기쁜 낯빛으로 나아가 화사한 봄 꽃들과 여릿여릿 새잎들을 마중해야겠다.

.



*마중/ 허림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

말 한마디 그리운 저녁 얼굴 마주하고 앉아

그대 꿈 가만가만 들어주고

내 사랑 들려주며


그립다는 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

사는 게 무언지 허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

             아침식사 중인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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